예수와 가바야(28)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할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05회 작성일 24-03-20 11:40

본문

I.    어떤 죽음

    1.  어떤 사람이 목을 메어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다. 투자한 사업이 실패해서 돈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돈을 잃었다고 해서 굶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녀들은 다 독립했고, 자신의 집도 갖고 있고,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였다.
 
  2.  교회의 장로였던 그는 어떻게 해서 “자살에 이르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에게 따지듯이 물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왜 축복 설교를 하지 않느냐?” 그는 결국 그 교회를 떠나갔다. 자신이 듣고 싶은 설교도 아니었고, 자신이 다니고 싶은 교회도 아니었다. 더 이상 성장할 것 같지 않는 작은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초라해 보였다. 그렇다고 대형 교회에 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늘 돈과 성공에 목 말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에 만족하지 못했다.

  3.  그는 자살로써 현재의 기독교 신앙을 고발한 것이 아닐까? “나의 신앙이 나를 실망시켰다!”   


            II.  신앙의 공식화(formulation of faith)

 1.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축복”은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요한 삼서 1: 2 절에 근거한 그의 주장, 즉 “예수 잘 믿으면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물질, 그리고 건강까지 복을 받는다”는 성공 신앙의 공식(the formula of faith)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기도의 불을 짚이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그의 메시지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적극적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으로 유명한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로 대표되는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한국적 버전(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번영신학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서에 너무 잘 맞아 떨어졌다.
 
 2. 이런 믿음의 공식대로 열심히 했더니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받았을 것이다. 삼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박자 혹은 일박자 축복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수많은 간증이 생겨났고, 이것이 사람들을 더 믿음과 희망으로 이끌었다.

 3. 반대의 경우는 없었을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실패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아마 성공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항상 묻혀버린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직은 부족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4. 조용기 목사의 사후, 삼박자 축복에 대한 강조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 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최근에도 나는 서울의 모교회의 버스에, “우리 교회로 오면 복 받습니다”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차라리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는 현수막을 달아야 하지 않을까?


          III.  숫자로 표현되는 신앙

 1.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한다?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면, “성공하려고 예수 믿는 거 아니다”라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열심히 예수 믿었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것은 실례되는 질문일까?

    이미 사람들의 인식에는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한다. 축복받는다"라는 생각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싶어 한다. 믿음 외에 다른 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절박하다. 기도원에 가 보면 밤새도록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들 중에는 '예수를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보다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이 이미 수학의 공식처럼 신앙의 공식이 되어 있다.

  2. 교회는 사람들에게 "예수 잘 믿는다"의 기준을 제공했다.
   
  1) "예수 잘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잘 믿으면”  이라는 말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의 조건이 되어버리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성공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처럼 예수 잘 믿는다는 것도 가시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교회 출석, 헌금, 봉사, 전도, 그리고 교제"라는 신앙의 가시적 척도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2) 교회의 직분자를 선출할 때도, 다섯 가지 기준으로 미리 점검표(check list)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신앙을 숫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신앙의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만이 교회의 장로와 같은 직분에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회에 잘 출석해야만 장로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한다고 하자. 이는 숫자로 표기된다. 일 년에 몇 번 이상 출석해야 할까? 적어도 50% 이상? 혹은 십일조는 얼마나? 일 년 열 두 달 중 몇 번 이상을 십일조 드려야 하는가?  이런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된다. 잘못된 방식일까? 아니다.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장로후보가 될 수 있을까?

 3)  문제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머리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이처럼 가시적 신앙행위로 평가되기 시작했고, 교인들을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직분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끔 되었다. 만약 이 기준을 통과한 다음에도 어떠한 보상도 교회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IV.  신앙을 공식(formula)으로 만들 수 있을까?

  1.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관계에는 공식(formula)이 존재할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합격일까? 얼마나 봉사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얼마나 헌금해야 충성이 증명될까?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의 하한선(下限線)을 그은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할 때, 열 개 중의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열 개를 대표하는 하나이다. 즉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로 하나를 드리는 것이다.

  2.  이 의미를 간과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다. 예수는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고 지적했다. 십일조를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렸지만, 십일조의 정신은 내다 버렸다. 그것은 위선이었다(마 23: 23).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대답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마 19: 20-21). 그는 수학공식처럼 된 율법을 지켰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을 닮지도 않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3. 예수는 가르쳤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22: 37-39). 이런 신앙을 가지면 출석, 헌금, 봉사와 같은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가시적 신앙을 위해서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 예수의 말씀처럼,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 모든 신앙의 부작용은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4.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을까? 이웃을 사랑했을까?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정직하지는 않았다. 그는 열심히 봉사했지만 자신의 존재감이 더욱 중요했다. 신앙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신앙은 수단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공식대로 열심히 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가시적 신앙의 기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맺지 못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지 못한 채, 사람들이 축복을 위해 만든 수학 방정식처럼 된 신앙이 자신의 삶에 마지막 순간에  절망이 되어 버렸다. 


            V. 그는 피해자였다.

  1.  이것이 그의 책임일까?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는 평생 어떤 설교를 들었을까? 그는 교인들의 모임에서 어떤 가치관을 공유했을까? 그는 세속화된 교회의 피해자(scapegoat)였다. 오늘의 교회는 축복과 성공을 얻을 수 있는 신앙을 패키지(package)로 만들어 팔고 있다. 현대인의 정서에 잘 맞는다. 햄버거 가게도, 여행사도 패키지 상품을 내 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편해 한다. 가상 공간에 등장하는 신앙강좌들을 보면 구미가 당기는 제목들이 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을 잘 받습니다". "이런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후죽순 격으로 쪽집게 과외 선생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신앙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가 되는 신앙을 말한다. 신앙은 수단이 되어 버렸다.

  2. 신앙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다. 기쁠 때고 있지만, 힘들 때도 있다.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기도응답이 빠를 때도 있지만, 더딜 때도 있다. 잘 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변함없는 신뢰관계이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까지 갈 수 있고, 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는 것이다". 그런 신앙의 핵심에는 사랑, 즉 "하나님과 이웃을 양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3.  만약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예수가 가르친 신앙을 강조했더라면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역경을 극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그럼에도 오늘의 교회는 책임감을 느끼지도 못한 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우리 교회로 오면 복 받습니다"를 외치고 있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 것일까? 왜 교회를 다니는가? 기독교가 사이비 종교처럼 되어 간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교회인가? 아니면 가야바의 추종자인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TOKYO NEW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