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 (25) 교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다(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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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3,004회 작성일 24-02-06 20:31본문
III. 큰 교회 목회자는 작은 교회 목회자보다 왜 사례비를 더 많이 받을까?
1. “그것은 상식이 아닌가?”
1)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주니까 받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교인들의 대표는, “많이 있으니까 많이 주는 것 아닌가?”라고 대답할까? 아마 나의 짐작으로는 양쪽 다 얼버무릴 것이다. 그들은 "쓸데없는 질문(?)" 에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을 묻다니.
2) 그러나 이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관행이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anti-Jesus)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제까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바로 이 상식 때문에 수 많은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누가 많이 갖느냐" 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본능을 이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한 두 번은 이길지 모르지만, 신앙으로 본능을 이겨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3) 다시 묻고 싶다. "왜 큰 교회의 목회자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보다 사례비를 더 많이 받아야 하는가?" 이들이 작은 교회의 목회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해서 '일한 만큼' 받기 때문일까? 실제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홀로 여러가지 역할을 감당하며 지칠 정도로 일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4) 목회자들이 자신의 수입이 많은 것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 정도는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더욱 학벌과 자격을 높이는가? 아니면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하는가? 성공에 따른 '마땅한 보수'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아직도 물질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언제 예수의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기준은 항상 "일용할 양식"이다. 그런데 예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일용할 양식마저 서로 나누어야 한다.
5) 자격을 많이 갖춘 목사는 더 큰 교회, 수준 높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모든 자격을 갖추신 예수는 스스로 종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이 큰 교회를 세웠으니 내가 후임이 되어서 그 열매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교회는 사업장(事業場)이 아니라 사역장(使役場, field of ministry)이다. 모든 크리스찬들은 열심히 일하는 '무익한 종'이다. 예수께서 이 이 말씀을 그처럼 강조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2. 그것은 경제 논리에 따른 것이다.
1) 미국 노총(AFL-CIO)의 보고서에 따르면, S&P 500 지수에 포함된 기업 CEO의 평균 연봉은 1,550만 달러인 반면에, 생산직 직원들의 연봉은 5만 3,500달러였다. 양자의 임금 격차는 299배였다. 이 격차는 지난 10 년 간 증가해 왔다. 기업별 CEO의 연봉도 그 격차가 천차만별이었다. 페이컴(Paycom)의 CEO는 무려 2 억 달러의 보수를 받았다(2020년).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벌어 올 수 있는 유능한 CEO가 항상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죽어가던 회사를 살리기도 한다. 미국의 아이어코카( Lee Iacocca, 1924-2019)씨가 빛 더미에 허덕이던 크라이슬러(Chrysler) 자동차를 회생시킨 사건은 지금도 기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보수를 많이 주는 것은 기업의 목적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한 만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2) 대형교회의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는 이처럼 경제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제 논리는 부지불식간에 교회의 지배논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교회가 왕궁으로 간 다음부터가 아닐까(AD 311). 그 때부터 교회는 로마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계급제도가 생기고 조직을 만들고, 나아가서 스스로 몸짓 불리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결과를 많이 낸 사람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리고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특히 한국처럼 개교회주의, 급성장, 그리고 계층 문화 속에서는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수용되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IV. 교회는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1. 첫째,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교회의 상식이 되어 있다.
1) 교회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다.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충성하면 의식주는 하나님이 책임진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왜 경제적 불평등이 교회의 연합을 저해하고, 신앙을 비틀기까지 방치했는가? 그것도 평신도들이 아닌,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복음전파를 빙자한 교회 스스로의 몸짓불리기에 힘을 쏟기 때문이다. 이 일 만큼은 구교나 신교나 어떠한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복음전파가 교회의 목적이지만, 이것을 숫자로 표현하게 되면 목적이 바뀌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복음전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올 해는 작년에 비하여 배 이상 새신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워보자. 작년에 등록한 새신자가 1,000 명이라면 , 올해는 2,000명의 새신자를 등록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중요한 목표는 "새신자 2,000명 달성"이 된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가시적 목표가 된다. 숫자로 치환된 가시적 목표는 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시설을 확충하고 인재를 모집한다.
이렇게 되면 기도, 경건생활, 예배와 같은 신앙생활 자체가 교회성장 지향적이 되어버린다. 교회성장과 무관한 신앙생활은 평가절하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은 교회 광고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교인이 일 년에 100명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 간증이 될 수 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담임목회자의 역할이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담임을 청빙한다고 해 보자. 당연히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유능한 목회자' 여야 한다. 유능하다는 것은 숫적 성장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그의 인격이 훌륭하다". "그는 사랑이 많다"는 것은 청빙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새로 부임한 목사가 기대한 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사임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유능한 사람이 올 수 있다.
4) 자본주의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돈 벌이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욕망" 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장이라는 멈출 수 없는 욕망(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신앙은 숫자로 치환될 수 밖에 없고, 숫자로 표기된 신앙은 더욱 큰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아무도 멈출 수 없다. 이를 위해 교회의 이사회는 유능한 담임목회자(CEO)에게 많은 사례를 제공하고, 담임목회자는 이를 당연히 수고의 대가로 받아 들인다. 결국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곳 까지는 먹혀들지 않는다.
2. 둘째, 관료주의가 교회의 시스템이 되었다.
1) 인류 역사상 사람과 단체를 관리하기에 가장 뛰어난 시스템이 관료제도(bureaucracy)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관료제는 사람들에게 능률성(efficienc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계산가능성(calcularbility), 그리고 통제(control)를 보장해준다. 독일(Preussen)에서 출발한 관료제는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언어와 민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관료제를 도입했다.
2) 그런데 관료제의 기본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분업과 계층구조에 있다. 계층구조(hierarchical structure)는 상명하복의 인간관계와 계층에 따른 월급의 차이를 낳는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상명하복의 관계는 당연하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월급의 차이는 당연하다. 왜 그리 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이미 관료체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3)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이 분업화되어 있다. 교육부서는 나이에 따라서 세분화되어(specialized) 있다. 사역부서도 각 분야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세분화된 부서에는 또 계층화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조직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한지 갖추려고 애를 쓴다.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전문화된 일꾼이 필요하다. 유지비용이 그만큼 들어간다. 사람들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당연한 지출이라고 여긴다. 교인들은 비로소 이처럼 계층화, 분업화된 관료적 구조안에서 안정감을 누린다. 이것이 합리적(rational)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합리적인 것은 다 성경적일까? 막스 웨버(Max Weber, 1864-1920)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관료제도가 "비인간화(dehumanization)"를 심각하게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윌로우크리크(Willow Creek) 교회의 보고서에서, 그들이 자본주의및 관료주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서의 30년 제자훈련의 결과는 "예수를 닮은 제자"를 양성에게 성공적이지 못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예수가 가르친 사랑과 용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자기 헌신과 절제,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은 교회의 숫적 성장을 목표로 삼은 교회의 논리, 즉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문화 속에서는 평가절하 된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속에서 빛을 내지 못 하고, 점점 게토화(ghettoization)되고 만다.
V. 숨길 수 없는 돈 문제 : 누가 해결할 것인가?
1. 지금의 사회는 욕망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드러내고 추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기업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치인들도 욕망을 채운다. 교육자, 예술가, 공무원등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도 자신들의 밥그릇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염려해서, 죽어가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 채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사회속에서 교회는 빛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으로 빛을 비출까? 예배로? 기도로? 설교로? 아니다. 행동이다. 예수는 너희의 착한 행실로 빛이 되라고 했다(마 5: 16). 사람의 행동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과 관련된 행동이 아니겠는가? 목회자들 만큼은, 교회 만큼은 예수의 본을 따라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신앙이다. 욕망이라는 독가스로 가득 찬 사회에 해독제(解毒劑)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교의 지름길이다.
3. 교회에서 돈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는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돈처럼 신앙과 직결되는 것이 또 있을까?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는 현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사역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시기질투하고, 또는 상처받는다. 이것 때문에 교회는 타락하고, 교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 때문에 선교의 문이 막히고 사회로부터 신뢰성을 잃어만 간다. 그럼에도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면 교회도 수면 아래로 내려 갈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향을 수정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누가 할까? 어떻게 할까? 언제 할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3. 나 자신도 여기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할 자신은 없다. 왜냐하면 실현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계적인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기존의 교회들이 다 파괴되고, 오직 크리스찬만 점 조직으로 살아난다면 가능할까? 실제로 북한의 교회나, 박해 시의 중국의 지하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별로 없었다. 초대 교회처럼!
4. 그렇지만 실현가능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싶다. 이 글의 마지막에.
1. “그것은 상식이 아닌가?”
1)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주니까 받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교인들의 대표는, “많이 있으니까 많이 주는 것 아닌가?”라고 대답할까? 아마 나의 짐작으로는 양쪽 다 얼버무릴 것이다. 그들은 "쓸데없는 질문(?)" 에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을 묻다니.
2) 그러나 이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관행이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anti-Jesus)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제까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바로 이 상식 때문에 수 많은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누가 많이 갖느냐" 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본능을 이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한 두 번은 이길지 모르지만, 신앙으로 본능을 이겨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3) 다시 묻고 싶다. "왜 큰 교회의 목회자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보다 사례비를 더 많이 받아야 하는가?" 이들이 작은 교회의 목회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해서 '일한 만큼' 받기 때문일까? 실제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홀로 여러가지 역할을 감당하며 지칠 정도로 일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4) 목회자들이 자신의 수입이 많은 것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 정도는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더욱 학벌과 자격을 높이는가? 아니면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하는가? 성공에 따른 '마땅한 보수'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아직도 물질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언제 예수의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기준은 항상 "일용할 양식"이다. 그런데 예수는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일용할 양식마저 서로 나누어야 한다.
5) 자격을 많이 갖춘 목사는 더 큰 교회, 수준 높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모든 자격을 갖추신 예수는 스스로 종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이 큰 교회를 세웠으니 내가 후임이 되어서 그 열매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교회는 사업장(事業場)이 아니라 사역장(使役場, field of ministry)이다. 모든 크리스찬들은 열심히 일하는 '무익한 종'이다. 예수께서 이 이 말씀을 그처럼 강조했는지 깨달아야 한다.
2. 그것은 경제 논리에 따른 것이다.
1) 미국 노총(AFL-CIO)의 보고서에 따르면, S&P 500 지수에 포함된 기업 CEO의 평균 연봉은 1,550만 달러인 반면에, 생산직 직원들의 연봉은 5만 3,500달러였다. 양자의 임금 격차는 299배였다. 이 격차는 지난 10 년 간 증가해 왔다. 기업별 CEO의 연봉도 그 격차가 천차만별이었다. 페이컴(Paycom)의 CEO는 무려 2 억 달러의 보수를 받았다(2020년).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벌어 올 수 있는 유능한 CEO가 항상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죽어가던 회사를 살리기도 한다. 미국의 아이어코카( Lee Iacocca, 1924-2019)씨가 빛 더미에 허덕이던 크라이슬러(Chrysler) 자동차를 회생시킨 사건은 지금도 기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보수를 많이 주는 것은 기업의 목적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한 만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2) 대형교회의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는 이처럼 경제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제 논리는 부지불식간에 교회의 지배논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교회가 왕궁으로 간 다음부터가 아닐까(AD 311). 그 때부터 교회는 로마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계급제도가 생기고 조직을 만들고, 나아가서 스스로 몸짓 불리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결과를 많이 낸 사람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리고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특히 한국처럼 개교회주의, 급성장, 그리고 계층 문화 속에서는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수용되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IV. 교회는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1. 첫째,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교회의 상식이 되어 있다.
1) 교회의 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다.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충성하면 의식주는 하나님이 책임진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왜 경제적 불평등이 교회의 연합을 저해하고, 신앙을 비틀기까지 방치했는가? 그것도 평신도들이 아닌,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복음전파를 빙자한 교회 스스로의 몸짓불리기에 힘을 쏟기 때문이다. 이 일 만큼은 구교나 신교나 어떠한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복음전파가 교회의 목적이지만, 이것을 숫자로 표현하게 되면 목적이 바뀌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복음전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올 해는 작년에 비하여 배 이상 새신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워보자. 작년에 등록한 새신자가 1,000 명이라면 , 올해는 2,000명의 새신자를 등록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중요한 목표는 "새신자 2,000명 달성"이 된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가시적 목표가 된다. 숫자로 치환된 가시적 목표는 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시설을 확충하고 인재를 모집한다.
이렇게 되면 기도, 경건생활, 예배와 같은 신앙생활 자체가 교회성장 지향적이 되어버린다. 교회성장과 무관한 신앙생활은 평가절하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은 교회 광고에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교인이 일 년에 100명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 간증이 될 수 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담임목회자의 역할이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담임을 청빙한다고 해 보자. 당연히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유능한 목회자' 여야 한다. 유능하다는 것은 숫적 성장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그의 인격이 훌륭하다". "그는 사랑이 많다"는 것은 청빙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새로 부임한 목사가 기대한 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사임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유능한 사람이 올 수 있다.
4) 자본주의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돈 벌이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욕망" 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장이라는 멈출 수 없는 욕망(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신앙은 숫자로 치환될 수 밖에 없고, 숫자로 표기된 신앙은 더욱 큰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아무도 멈출 수 없다. 이를 위해 교회의 이사회는 유능한 담임목회자(CEO)에게 많은 사례를 제공하고, 담임목회자는 이를 당연히 수고의 대가로 받아 들인다. 결국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곳 까지는 먹혀들지 않는다.
2. 둘째, 관료주의가 교회의 시스템이 되었다.
1) 인류 역사상 사람과 단체를 관리하기에 가장 뛰어난 시스템이 관료제도(bureaucracy)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관료제는 사람들에게 능률성(efficienc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계산가능성(calcularbility), 그리고 통제(control)를 보장해준다. 독일(Preussen)에서 출발한 관료제는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언어와 민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관료제를 도입했다.
2) 그런데 관료제의 기본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분업과 계층구조에 있다. 계층구조(hierarchical structure)는 상명하복의 인간관계와 계층에 따른 월급의 차이를 낳는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상명하복의 관계는 당연하다.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월급의 차이는 당연하다. 왜 그리 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이미 관료체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3)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이 분업화되어 있다. 교육부서는 나이에 따라서 세분화되어(specialized) 있다. 사역부서도 각 분야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세분화된 부서에는 또 계층화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조직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한지 갖추려고 애를 쓴다.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전문화된 일꾼이 필요하다. 유지비용이 그만큼 들어간다. 사람들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당연한 지출이라고 여긴다. 교인들은 비로소 이처럼 계층화, 분업화된 관료적 구조안에서 안정감을 누린다. 이것이 합리적(rational)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합리적인 것은 다 성경적일까? 막스 웨버(Max Weber, 1864-1920)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관료제도가 "비인간화(dehumanization)"를 심각하게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윌로우크리크(Willow Creek) 교회의 보고서에서, 그들이 자본주의및 관료주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서의 30년 제자훈련의 결과는 "예수를 닮은 제자"를 양성에게 성공적이지 못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예수가 가르친 사랑과 용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자기 헌신과 절제,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은 교회의 숫적 성장을 목표로 삼은 교회의 논리, 즉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문화 속에서는 평가절하 된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속에서 빛을 내지 못 하고, 점점 게토화(ghettoization)되고 만다.
V. 숨길 수 없는 돈 문제 : 누가 해결할 것인가?
1. 지금의 사회는 욕망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드러내고 추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기업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치인들도 욕망을 채운다. 교육자, 예술가, 공무원등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도 자신들의 밥그릇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염려해서, 죽어가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 채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사회속에서 교회는 빛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으로 빛을 비출까? 예배로? 기도로? 설교로? 아니다. 행동이다. 예수는 너희의 착한 행실로 빛이 되라고 했다(마 5: 16). 사람의 행동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과 관련된 행동이 아니겠는가? 목회자들 만큼은, 교회 만큼은 예수의 본을 따라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신앙이다. 욕망이라는 독가스로 가득 찬 사회에 해독제(解毒劑)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교의 지름길이다.
3. 교회에서 돈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는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돈처럼 신앙과 직결되는 것이 또 있을까?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는 현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사역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시기질투하고, 또는 상처받는다. 이것 때문에 교회는 타락하고, 교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 때문에 선교의 문이 막히고 사회로부터 신뢰성을 잃어만 간다. 그럼에도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면 교회도 수면 아래로 내려 갈 것이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향을 수정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누가 할까? 어떻게 할까? 언제 할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3. 나 자신도 여기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할 자신은 없다. 왜냐하면 실현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계적인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기존의 교회들이 다 파괴되고, 오직 크리스찬만 점 조직으로 살아난다면 가능할까? 실제로 북한의 교회나, 박해 시의 중국의 지하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별로 없었다. 초대 교회처럼!
4. 그렇지만 실현가능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싶다. 이 글의 마지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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