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뱌(18) 후미에(踏み絵)와 엔도슈사꾸(遠藤周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3,086회 작성일 24-01-22 12:45

본문

I.  후미에(踏み絵)

  1.  예수가 후미에를 하라고 했다?

      “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신부(神父)가 성화(聖畵)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그 날 이후, 로드리고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며, 자신을 배신한 키치지로(キチジロ)마저 용서하게 된다”.

 2.    일본의 유명한 작가 엔도슈사꾸(遠藤周作, 1923-1996)의 작품, "침묵(沈默, silence)" 의 한 장면이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시절, 큐우슈우(九州)지방에서 선교하던 로드리고(Rodrigo) 신부에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가 후미에(踏み絵)를 하지 않으면, 그가 세례를 준 교인들을 한 명씩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후미에를 하고 사람들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거부하고 사람을 죽게 놔둘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그가 들은 예수의 음성이었다. 결국 그는 후미에를 하고 사람들을 살린다.
   
  3.  "너는 죽는다지만, 앞으로 너 때문에 죽어갈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멜 깁슨(Mel Gibson)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의 한 장면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에 분투하고 있는 예수에게 사탄이 찾아와서 유혹한다.

      멜 깁슨은 엔도슈사꾸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수로 인하여 수 많은 순교자가 나오더라도 예수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 때문에 지난 2천 년 동안 셀 수도 없는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죄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면 이들이 죽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이들은 산다. 과연 예수가 로드리고 신부처럼 선택을 했어야 할까?

  4. 로드리고의 선택, 즉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후미에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선택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의 선택이 옳다면 예수에 대한 신앙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육체의 죽음에서 살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즉 기독교의 신앙은 죄사함과 부활, 그리고 영생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전락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가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사람들, 지키고 싶었던 교회는 도쿠가와 막부의 혹독한 탄압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살아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남아있는 성도와 교회를 지키려면 후미에를 하는 것이 옳다는 로드리고의 가르침이 곧 예수의 가르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교회도 신앙도 점점 사그라져 버렸다.

  5.  침묵의 이 장면은 대단히 감동적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런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라 박애주의적 사랑이다. 

    뿐만아니라, 그것은 로드리고 신부의 선택이지만, 결국은 작가인 엔도 슈사꾸의 선택이다. 나아가서 일본 크리스찬들의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옮은 것은 끝까지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다"는 입장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이라도 전체를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을 일본 정신의 근간이 되는 와(和)의 흐름 속으로 가져 온 것이 아닐까?

      침묵은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상상해 보자. 만약에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를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면, 그의 죽음 이후의 일본의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로드리고의 선택, 즉 엔도 슈사꾸의 논리가 지금도 일본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앙의 논리처럼 보인다.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와(和)의 핵심이다. 이것이 교회의 핵심 가치관이 되면, 한편으로는 대단히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야바의 논리에 빠지게 한다. 예수 때문에 생겨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포기하는 논리가 된다. 어느 덧 교회 공동체의 주인이 예수가 아닌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II. 와(和)의 양면성
 
 1.  와(和)는 밥(禾)을 나눠 먹는다(口)는 뜻이라고 말해진다. 밥상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공동체의 생존(survival)이다. 밥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함께 일해야 한다. 서로 사이가 좋아야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하기를 싫어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징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의 와(和)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하나됨(oneness)을 지키는 것은 최고의 미덕이지만, 하나됨을 헤치는 것을 최악의 행동이다. 공동체에 폐(迷惑)를 끼치는 행동이다. 따라서 와(和)에 우선하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와(和)는 생존 그 자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2.  에도(江戶) 시대 촌락공동체의  '무라하치부(村八分)'라는 관습을 보자. 이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허무는 사람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기본적인 필요 10가지 있다. 즉 ①冠(관) ②婚(혼) ③葬(장) ④祭(제) ⑤建築(건축) ⑥病(병) ⑦水害(수해) ⑧旅行(여행) ⑨出産(출산) ⑩火災(화재)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장례와 화재를 제외한 나머지 8가지의 필요를 전부 끊어버리는 것이다. 장례나 화재는 도와주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로 피해가 확대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 보다는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동정이었다. 무라하찌부를 당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더 이상 살아가지 못 한다. 왜냐하면 그 때는 산이나 수풀도 다 마을의 공동소유였기 때문이다. 다른 마을로 간다고 해도 소문이 더 빨리 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와(和)의 울타리 안에서는 보호받지만, 울타리를 허물거나 벗어나는 순간에는 비참해 진다. 따라서 하나로 뭉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무라하치부를 결정하는가? 마을 회의에서 한다. 마을의 회의는 누가 주도하는가? 마을에서 가장 힘 있는 자들이 한다.  1909년에는 최고재판소는 무라하치부의 공식적 통보는 위법으로 간주했다. 그럼에도 와(和)는 여전히 일본 정신과 문화의 핵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III.  와(和)에 갇혀버린 신앙

    1. 키타무라(北村慈郎) 목사의 소위 '성찬문란(聖餐乱れ)' 사건

  1)  키타무라(北村慈郎) 목사는 자신이 섬기고 있던 요코하마(横浜)시, 코우요자카(紅葉坂)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예배자에게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2010년 일본기독교단에서 목사면직 처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그는 일반 재판에 호소했지만, 동경지방 재판소는 “법률상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기각했다. 일본 법원의 입장은 분명했다. '법원은 종교단체가 반사회적 행위를 한 경우가 아니면 종교단체의 일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 하위조직은 상위조직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2) 키타무라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사정상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을 성찬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선교적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선교적 차원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이슈를 단지 질서문란으로만 규정지어 처벌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하여 교단은 “교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했다.

  3) 나는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성경적일까’ 하는 질문은 보류하겠다. 다만 이 사건을 처리하는 일본기독교단의 태도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키타무라 목사의 주장처럼, “공개성찬(open communion)이 왜 잘못인지? 선교적 입장에서 개선할 여지가 있는지?”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공개토론의 장을 열자는 시도를 원천봉쇄 해 버렸다. 하나됨을 허무는 하부집단이나 개인의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2. 동경신학대학과 일본어 능력시험

  1) 일본기독교단 소속의 동경신학대학(Tokyo Union Theological Seminary)이 있다.  1873년에 시작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어능력시험(JLPT)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시험은 일요일에 시행된다. 주일에 예배 대신에 이 시험을 쳐야만 한다. 신학교가 이 시험의 결과를 요구한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주일에 치러지는 시험을 신학교가 요구를 하다니. 한국교회는 주일에 시행되던 사법고시와 같은 국가고시마저 다른 날로 옮기도록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신앙적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교회의 입장은 다르다. 교회는 국가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평가할 것이 아님을 알지만, 또한 문화에 따라서 신앙의 모습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을 하지만.... 

  2) 일본 교회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내부적으로는 절대로 이탈을 허용하지 않지만 외부적으로는 흐름에 순응한다. 생존을 위한 단련된 감각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와(和)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갱신을 위한 외침은 단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난 행동이 될 수 있다.


          IV.  해답없는 질문만 계속된다.

  1.  이런 식으로 계속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교회는 갱신될 것인가? 점점 고령화 되는 교회가 오히려 자기 방어적, 폐쇄적인 태도로 인하여 점점 쪼그러 들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현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교회의 생존 자체가 교회의 목적은 아니지 않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늘 갱신하고 동시에 끓어올라야 한다.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야 한다. 때로는 반대를 뚫고 전진해야 한다.

  2.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교회의 사명 감당을 방해하고, 생존마저 힘들게 하고 있다.  굳어진 사고 방식, 굳어진 성경해석, 그리고 현상을 유지하면서 자리와 이익을 보존하려는 사고 방식! 그것이 사랑으로 보일 수 있다. 끈끈한 유대관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와는 다른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성전을 허물라"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외치고 행동하는 예수가 필요하다. 예수가 외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TOKYO NEW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