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 양립불가의 축(Incompatible Ax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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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81회 작성일 23-12-3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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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수, 가야바에게 죽임을 당하다

  1.    사도신경(Apostles’ Creed)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 라고 되어 있다. 라틴어 “sub Pontio Pilato" 를 옮긴 것인데, "빌라도가 다스리던 때(under Pontius Pilate)" 라는 뜻이다. 예수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빌라도 치하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a historical fact)' 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를 죽음으로 내 몬 사람은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Caiaphas)와 그의 장인 안나스(Annas)이다. 

  2.  예수도 가야바도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럼에도 가야바는 예수를 죽였고, 예수는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야바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유대교를 지키려고 예수를 죽였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유대교를 바꾸려다가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3.  두 사람의 주장은 절대로 양립(兩立)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주장은 지난 2 천 년 동안 기독교의 두 축이 되어 왔다. 엎치락덮치락. 예수가 승리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야바의 승리였다. 지금은 그 갈등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다. 예수는 여전히 자신의 교회안에서 가야바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가야바의 추종자가 되어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II.  우리는 누구의 추종자일까?

  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를 세우며 앞으로 나아감' 을 의미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신앙 생활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요사이 "평안하게, 행복하게 신앙 생활 하다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가는 것" 이 신앙 생활의 정석처럼 되어있다. 

    사람들이 바라는 '안정된 신앙 생활과 성장하는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일까? 아니면 가야바가 주는 환상일까? 가야바는 항상 현실의 안정과 이익을 보장한다. 예수는 늘 도전과 변화를 촉구한다. 예수의 이러한 요구는 크리스찬들을 부담스럽게 한다.

  2.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 싶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주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안전(security)을 무너뜨리는 무리한 요구였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좀 더 부드러운 말로, 좀 더 교육적인 태도로, 천천히 그를 이끌어 주지 않았을까? 인간의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의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수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오늘 크리스찬의 딜렘마가 여기에 있다. "꼭 예수의 말씀대로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지 않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받은 거듭난 자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하지 않는가?" "어찌 재산을, 그것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를 따라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가? 예수의 가르침이 예정 교리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는 나중에 다루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어떠한 신학적 이론이나 교리보다 우선한다).

  4. 예수께서 지금의 교회를 보시고, "교회의 재산을 다 처분하고 나서 나를 따르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교회를 세우려고 헌신한 사람들부터 예수에게 실망하여 떨어져 나갈 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한 예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곧이곧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적용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오늘의 크리스찬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예수의 명령과 요구가 꽤 많이 있다.  예수는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애써 성경해석이라는 도구로 그 의미를 희석시키면서, 재산도 지키고 구원도 얻으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5. 이런 믿음을 고수하게 되면, 다수의 크리스찬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군중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평상시에는 착하디 착한 신앙인이지만, 현실적인 이해관계 앞에만 서면 돌변한다. 예수의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가야바의 추종자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 이러한 사례들을 많이 보아왔다. 문제는 아무도 자신들의 이러한 변덕과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도 교회도, 나아가서 목사도 교인도! 신학교도 선교 단체도! 교단은 말할 것도 없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Christ)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은 가야바의 사람이다.

  6.  어느덧 교회 안에서 예수는 '그저 의를 외치는 성가신 시골 청년'이 되어 버렸다. 죽어 주어야 할 문제아(problem maker)가 되어가고 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할 때만 예수가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 회의할 때, 봉사할 때, 교제할 때, 특히 교회를 경영할 때는 가야바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가고 있다. 나는 이럴 때 예수의 주장이 먹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일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박수갈채를 받는 흠모의 아이콘(icon)이 되어 있는가?


              III. 이 글을 시작하면서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 2: 20-21)

    1. 성전을 허물어 버린 다음에는? 예수는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하셨다. 원래 성전은 자신의 몸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새로 지은 "몸으로서의 성전"은 무엇인가?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 1:23). 예수는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했다.

  2. 지금의 교회는 과연 예수가 꿈 꾸던 모습일까? 예수가 계획한 교회는 복음서에  분명한 윤곽이 나와있다. 그렇지만 세월과 함께 뒤틀려져 버렸다. 처음에는 밀라노 칙령과 더불어 그렇게 되었다(AD 311). 교회는 로마의 권력과 협력하면서 스스로의 안정과 욕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잠깐 제정신을 차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교회는 다시 자본주의, 관료제, 그리고 성공주의와 협력했다. 어쩌면 중세의 영적 어둠보다 자금이 더 어두운지도 모른다.

  3. 교회는 다시 우상이 되어버렸다. 가야바가 우상이 된 성전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듯이, 오늘의 교회도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예수는 자기의 피(몸)로 교회를 세웠지만, 가야바는 지금도 여전히 그 교회를 빼앗아 자신의 종으로 부려 먹고 있다. 가야바의 실체는 예나 지금이나 사탄이다.

  4. 나는 '예수와 가야바'의 두 개의 축을 가지고 교회와 신앙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보여지는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답을 제시했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역시 "구원의 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절대적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신학적 교리와 왜곡된 주장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길을 비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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