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실패한다(Justice Fail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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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84회 작성일 23-02-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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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다윗, 터가 무너진 곳에서 부르짖다
   
    1.  예수 탄생 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처럼 부르짖은 한 사람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밤낮 울부짖어도 주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십니다” (시 22: 1-3).

           
    2.    그는 무엇을 그렇게 부르짖었을까? 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보면서도 두려워서 떨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을 비롯한 군사들을 보았다. 정의감에 불타오른 그는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춰 죽였다. 백성들이 환호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삼상 17: 7).
 
        사울 왕과 그의 측근들로부터 '괘씸죄'를 얻은 다윗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마저 외면했다(시 69: 8). 아무리 도망쳐도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없는 그는 마침내 원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도망쳤다. 거기서도 미친 놈 행세를 하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도와 줄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는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뒤집어썼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성전을 위하는 열심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고 외친다(시 69: 7-9).       
 

            II.    다윗, 신앙의 한계점을 돌파하다
   
  1.    이러한 배경과 문맥에서 보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란 외침은 테너와 베이스처럼 두 가지의 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신뢰하고 의지했을 때 주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었으며 주를 신뢰하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시 22: 4-5).
   
      다윗이 배운 믿음은 “어려울 때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노예생활 하던 조상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집트를 심판하셨다. 가로막힌 홍해 앞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집트의 정예병들을 심판하셨다.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죄악으로 가득 찬 가나안 원주민들도 몰아내 주셨다.  역시 이러한 믿음으로 양떼를 공격하는 사나운 짐승도 물리치고, 심지어 골리앗도 이길 수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공간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테너(tenor)의 목소리처럼 우리를 확신으로, 승리로 나아가게 한다. 

    2.  이제 그러한 믿음이 산산이 깨어졌다. 죄가 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밤낮으로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모른 채 하신다. 나에게 숨은 죄악이 있어서 그런가? 그래서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부르짖었다. 원수들은 승승장구하고,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그들은 어김없이 사울 왕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오히려 사울에게 아첨하며 자신을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조롱한다. “정말로 죄가 없다면 어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까?”(시 22: 8).
   
      믿음의 영웅이 하루 아침에 떨어졌다.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닌 벌레에 불과하며 내 백성에게까지 멸시를 당하고 모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시 22: 6).

      다윗은 믿음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믿음으로는 도저히 지금의 상태를 이해할 수도 없다. 돌파할 수도 없다. 믿음을 포기할까?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은 여전하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고 계속 강조해야만 할까?

  3.    어떤 사람(집사)이 위암에 걸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잘못을 돌아보며 기도에 힘을 썼다. 온 교회도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40대의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어린 세 자녀를 불렀다. 그리고 유언했다. “너희들은 자자손손 예수를 믿지 말라”.  다윗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 집사처럼 유언을 하고 난 뒤에, 자신은 욥의 아내의 충고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야” 할까? (욥 2: 9)

  4. 드디어 다윗은 절망속에서 새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실패와 고민, 그리고 절망속에 나오는 묵직한 베이스(bass)의 저음을! 전에는 결코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믿음의 또 다른 소리를!  이제 그의 믿음은 테너의 아름다움과 베이스의 묵짐함이 어우러진 화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절망과 죽음을 넘어선 곳에 서 그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III.    다윗, 터가 무너진 사회에서 희망을 외치다
 
  1.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란 외침에서, “어찌하여(lama)"는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부패한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심전심으로 느끼면서 토해내는 그의 외침이다.
   
      들개와 같은 자들이 권력을 손에 넣고, 황소와 같은 힘과 사자의 사나움으로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정의를 불의로 바꾸며, 의인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하여”라는 부르짖음에 담아서 외치고 있다.

 2.    이러한 심정은 그의 다음 글에서도 보여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기초가 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서 누가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무너지는 건물에서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서, 더 좋은 방을 차지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다. 이러한 건물을 해체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외치는 의인들에게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다윗은 “터(기초)”를 복수형(hashatotu, foundations)으로 표현한다. 총체적 부패가 이미 깊숙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이지만, 인간의 질투는 옳고 그름을 삼키는 괴물이며,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마저 비트는 힘이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강하게 요구한다. 제발 이러한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시 22: 23).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닌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러한 사회속에서 눈과 귀를 막고 살고 있는가? 그러면 다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3.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은 "어찌하여 이러한 세상을 바로잡아 주시지 않습니까?”라는 외침이다. 탄식과 더불어 희망의 외침이다. 하나님께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온 땅의 주인이시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외침이기도 하다.


          IV.  다윗, 꿈을 꾸다
   
    1.  이제 그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반드시 '의인이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올 것을! 
   
      “가난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요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할 것이니 저들의 마음이 영원히 살리라. 온 세상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에게 돌아올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그를 경배하리라”(시 22: 26-27).
 
      가난한 사람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세상을 꿈꾼다. 이제는 더 이상 터가 무너진 세상도 아니고, 의인이 죄인이 되는 나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

    2.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통하여 세상을 다시 보았다. 이제는 자신의 억울함이 더 이상 외침의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바로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외침의 주제가 된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바칠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V.  다윗과 예수의 이중창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다윗의 부르짖음은 그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천 년의 간격을 메우며 이중창(duet)이 되었다.  그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외침은 절망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절망을 외쳐보지 않는 사람은 희망 또한 외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자가 희망을 외친다 하더라도 자신의 희생이 없는 희망을 외친다.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희망은 무책임한 망상에 불과하다.

  2.    오늘의 크리스찬들은 터가 무너진 곳에서 살고 있다. 애써 눈과 귀를 가리면서, 돈과 힘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면서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라며 되묻는다. 하늘에 속한 자가 세상에 속하지 못 할까 봐 초조해 하고 있다. 교회는 세속 가치관의 바벨론 포수가 되어 버렸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키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무수한 생명을 빼앗은 푸틴(V. V. Putin)을 축복했다.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병역의무를 다 하다가 죽는 것은 희생이며, 이러한 희생은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씻겨준다"고 설교했다(2022년 9월 25일). Oh, My God!
   
 3.  터가 무너진 곳이 어디 러시아 뿐이겠는가?

          터가 무너진 현실 탓함을 넘어서, 다윗처럼 부르짖고 꿈을 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의를 외치다가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절망을 넘어선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발견한 경험자들이 필요하다.
          믿음의 한계선을 돌파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신의 억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진심으로 외치는 일꾼들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 보고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는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4.  이러한 사람들은 지금도 다윗과 함께, 나아가서 예수와 함께 이중창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래는 세상의 구석구석 울림으로 퍼져 나아갈 것이다. 이런 화음을 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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