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실패한다(Justice Fail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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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3,346회 작성일 23-02-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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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Ελωι ελωι λεμα σαβαχθανι)!”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막 15:34).

예수의 외침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는 인류의 죄를 짊어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지만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죄의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조직신학적 설명 만으로는 납득이 안 된다.

2. 왜 이렇게 외쳐야 했을까?

나사렛 출신 청년 예수, 그는 지난 3년 동안 혼신을 다해 의(righteousness)를 외쳤고, 정의(justice)를 실현하려고 힘을 쏟았다. 그럼에도 힘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십자가에 죽였다.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도 몸을 피했다.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던 청중들도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아무도 그의 무죄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마저도 침묵했다. 십자가에 달린지 6 시간 째, 기진맥진, 그는 마침내 죽을 힘을 다해 외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II. 하나님께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다

1.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오해했다.

슈바이처는 말했다.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에 의한 마지막 반전도 없었다. 이에 실망하고 절망한 예수는 볼멘소리로 그렇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의 외침은 실망과 절망에서 나온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공의로운 심판을 포기하지 않고 요청한 것이다. 소망을 담은 역설적 외침이었다.

2. 마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막 14: 36).
예수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죽음이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런 죽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도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아니, 우리는 그가 의인 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죄인이었네. 더구나 십자가(나무)에 달려 죽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네" (신 21: 23, 사 53: 4).

이렇게 되면 자신의 삶과 외침이 송두리째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는 모든 과정에서조차 털 깍는 자 앞에서의 순한 양처럼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말과 태도를 통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 날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기도로써 승리한 그는 마침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일어나 가자"(마 27:46).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그는 "아바(αββα) 아버지여!" 라고 기도의 문을 열었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표현이었다. 오해받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원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순종해야 할 사명임을 아시고, 아버지께 모든 과정을 맡긴 것이다. .

3. 예수,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다

그렇다면 입 다물고 용감하게 죽으면 되지, 왜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을까? 제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이 불법(illegal)이라고 증언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행 2: 23). 오순절에 성령받은 베드로가 유대인 청중들에게 증거한 내용의 핵심이다. 그래서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불법적인 재판을 뒤집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가 죄인이었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겠는가? 예수가 옳았고 너희들이 틀렸다.

2) 사도 바울도 예수의 죽음은 부당한 죽음이라고 증거했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2: 8). 당시 십자가 처형은 반역자에게 행해진 처벌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죄목은 반역이었다(마 27: 37). 반역은 권력과 조직에 대한 도전이다. 그들이 "옳다"는 주장에 "아니다"로 맞선 것이다. 예수가 옳았다. 그 증거는 바로 그의 부활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가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의 틀림과 죄악에 대한 폭로였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잘못된 재판에 대한 하나님의 바로잡음이었다. 세상의 불법아래서 힘없던 희생자가 지금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어, 세상을 심판하고 계신다.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요 7:7b)


4. 예수는 의인들의 대변자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죽음은 부당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거했다. 그렇다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는 예수의 외침은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세상의 죄악이 폭로되는 사건이라면, 예수의 외침은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죽음이 죄인들의 대표자로서의 사명이었다면 "예수의 외침은 억울한 의인들의 대표자로서의 폭로이며 고발" 이었다.

"의인이 죄인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조롱만 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이 일을 어찌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이렇게 죽을 수 밖에 없다면,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인들의 억울함에 대한 대표자로서의 항변이었다. 나아가서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제물로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요, 그 순종을 통하여 마침내 공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의 역설적 표현이다. 이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보면 알 수 있다.


III. 너희들도 가서 나처럼 죽어라

1. 예수의 명령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마 10: 16).

이리 떼 속으로 들어가면 양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보냈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와서 죽는 것처럼, 너희들도 가서 죽어라"는 것이다(요 17:18).

안전장치는 있을까? 죽기 전에 기적을 일으켜 줄까? 죽음에 따르는 보상을 줄까? 복수는 해 줄까? 아니다. 그냥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한 것을 요구한다. 스승이 그렇게 죽었는데 어찌 제자가 스승보다 편안한 길로 가려하는가?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마 10:24).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스승처럼 "버림받음"을 당하였다.

가서 죽지 않을 방법, 즉 버림받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예수는 다른 길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이리 떼에게 잡혀 죽어야만 이리 떼가 양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2 천 년 간 양을 잡아 먹은 이리는 더 이상 이리로 존재하지 못 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 예수의 "역설적 원리"(paradoxical principle)이다.


2. 요한의 질문

예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오래 살았던 요한은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것 같다. "왜 세상에서는 정의가 불의를 이기지 못하고, 의가 악을 이기지 못할까?" "왜 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가?" "엄연히 의로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이러한 세상이 언제 회복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이 책의 내용 한 곳을 보자.

“그들은 큰 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주님, 언제나 땅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여 우리를 죽인 원수를 갚아 주시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동료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그들에게 잠시 동안 더 쉬라고 하셨습니다"(계 6:10-11).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기도이다. 이들 가운데는 베드로도, 안드레도, 그리고 자신의 형 야고보도 있다. 이들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답은 "반드시 그렇게 해 주겠다. 그렇지만 좀 더 기다려라"였다.

이 대답을 들은 요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순교자들은 하늘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기다린다지만, 이 땅에 있는 주의 종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억울한 죽음을 죽어야 합니까? 언제 불의가 패배하고 의가 승리합니까?"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글 마지막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가겠다.'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계 22: 20).

하루 빨리 오셔서 이처럼 뒤틀린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소서! 그때까지 견디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마라나타!


IV. 촛불은 어둠에서 빛난다

1. 교회안에서도 정의는 없다.

“교회에서 만큼은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해야 하고, 할 것이다". "지금은 정의가 실패하는 듯이 보이지만, 고난을 참고 나면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세상을 향해 의와 정의를 외쳐야 하는 교회만큼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크리스찬들의 상식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들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안에서조차 하나님의 의와 정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후 지금까지 세상이 크리스찬을 박해한 숫자보다, 교회가 크리스찬을 박해한 숫자가 더 많다. 중세의 종교재판이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정의가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목숨을 걸고 의를 외치며 정의를 위해 살 것인가? 타협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인가?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 질문에 대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의 역설적 외침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찬들은 많고도 많고, 주의 종들도 많은데, 교회안에서조차 의와 정의가 실종되는 것은 누구를 따름인가?


2. 촛불은 어둠 속에 있어야 한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하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라"(마 5: 15-16b).

예수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마 5:14).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수 때나 지금이나 항상 어둠이었다. 그래서 빛이 되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의 크리스찬들은 어둠 속에 가지 않는다. 주의 종들도 가지 않는다. 반대로 더욱 밝은 곳으로, 정오의 태양빛 속으로 나오려고만 한다. "나는 이런 곳에서 썩어 지낼 사람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성공을 바랄수록 타협하고, 침묵하고, 빛을 잃게 된다. 의를 외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뀐다. 아쉽고도 아까운 일이다.


3. 예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그분이 겪은 수치를 함께 당합시다"(히 13: 13).

1) 예수님은 지금 성문밖(outside the camp)에 계신다. 그곳은 속죄일에 죄를 짊어진 양이 버려지는 곳이다. 거기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범죄자들, 빚 값에 집을 날린 사람들, 술주정뱅이들, 그리고 나그네들이 모여 있다. 힘이 지배하고 어둠이 지배한다. 의도 정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성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법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 계신다. 주님은 지금 거기에 계시는데 그분의 제자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2) 정의가 승리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하다. 터가 무너진 곳에서도 여전히 터를 닦는 일꾼이 필요하다. 믿음은 희망이 사라진 다음부터 정작 필요하다. 죽지도 않고, 버림받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부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죽음과 절망을 넘어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 24b-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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