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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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5,109회 작성일 22-06-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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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다윗은 훌륭한 사람인가?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David)을 대단히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비록 그의 삶의 몇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지만. 그래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다윗(David)이라고 짓는 사람들도 많다.

    과연 그럴까? 만약 다윗이 오늘 날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충직한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녀의 남편을 치사한 방법으로 죽이고, 이 사실을 일 년이나 숨기다가 발각되었다. 스스로 자수하고 회개한 게 아니다. 파렴치한 인간이다.


            II. 다윗과 밧세바

1. 다윗은 성폭력 가해자이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돌아왔다. 그의 모든 군대는 요단 강 동쪽 암몬 왕국의 수도 랍바(Rabbah)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그는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나라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나른 한 봄 날, 평소보다 더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는 어느 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있었다. 늘 하듯이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거닐었다. 저만큼 아래에 있는 어느 집 뒤뜰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과 영혼이 고정되었다. 견딜 수 없는 정욕이 일어났다.
   
      부하를 시켜 알아보았다. 같은 유다 지파였다. 엘리암의 딸이었다. 엘리암은 다윗의 30인 특별부대원으로 다윗의 왕권확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삼하 23: 34). 엘리암의 아버지는 아히도벨이다(삼하 23: 34). 아히도벨은 오랫동안 다윗의 고문으로 충성해오고 있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힛타이트 족속 출신이지만, 이스라엘로 귀화한 사람으로 오직 다윗에게 충성하는 군인이다. 다윗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려다가 성욕을 채웠다.

2. 밧세바는 성폭력 피해자이다.

  1)  밧세바는 순수한 피해자인가? 왜 해거름에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했을까?
     
      나는 다윗성을 방문했을 때 다윗의 궁전이 있음직했던 곳에서 아래 쪽을 내려다 보았다. 밧세바의 집이 어디에 있었을지 궁금했다. 지금은 인가가 보이지 않지만…. 과연 다윗이 옥상에서 산책할 것을 밧세바가 예상하고 목욕했을까? 아마도 그런 여자는 드물 것이다. 집안에 목욕시설이 없던 서민들은 밖에서 목욕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한 밤중도 아닌 해거름인가? 자신의 생리가 끝남과 동시에, 추운 밤이 오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까?
       
  2)  그렇다면 밧세바는 왜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았을까? 설사 반항을 했더라도 힘없는 여성의 목소리와 몸짓을 누가 들어주었을까? 강력한 권력을 가진 노회한 왕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남편은 전쟁터에 가 버리고 어떠한 보호자도 없는데. 그 날 밤 밧세바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까?


            III.     성경은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1. 권력에 의한 성폭력과 탈취이다.

 1)    이 일은 40대 후반의 남자와 20대 여자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한 불륜사건도 아니다. 단순한 성폭력 사건도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권력의 옷을 입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폭력이다. 루드빅(D. C. Ludwig)과 롱겐넥커(C. O. Longenecker)가 이름지었듯이 "밧세바 증상(Bathsheba Syndrome)" 이다. 이 병은 성공한 자들에게서 특권처럼 발생하는 난치병(難治病)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병이 교회안에서는 이상하게시리 하나님의 사랑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2)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비유를 들어 '사건의 성격'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힘있고 돈 많은 어떤 사람이 가난한 이웃집의  '어린 암양(one little ewe lamb)' 을 빼앗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다. 그가 뺏은 어린 양은 이웃이 품에 안고 애지중지 하는 사랑의 대상이었다”(삼하 12: 1-4).  이 비유를 들은 다윗은 "그런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분개했다. 그것이 자기가 한 일인 줄은 모른 채….
   
      나단은 '왜 성적인 범죄를 했느냐'는 사실보다, '왜 남의 것을 빼앗았느냐'는 것을 지적한다.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그것도 힘없는 자의 것을, 그것도 이웃의 것을!  다윗은 이웃의 행복을 빼앗았다. 한 여자의 인격과 정조를 빼앗았다. 그들의 미래마져 빼앗았다. 이들을 보호하라고 양치기를 왕으로 세웠더니 강도가 되어버렸다.
   
  3)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첫째, 다윗의 성폭력 사건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뜻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오히려 가려운 데를 서로 긁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둘째, 다윗 자신도 자신의 일이 이처럼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힘을 가진 사람이 안정을 확보하게 되면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이다. 아무도 직언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처벌할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간의 죄책감이 있어도 자신은 중요한 사람이므로 그 정도는 면책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습관처럼 굳어진다. 설사 잡음이 생겨도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 능력의 과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을 업신여긴 교만이다.

 1)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삼하 12:10). 나단이 부연 설명한다. “왕이 원수들에게 여호와를 경멸하고 모독할 기회를 주었다”(삼하 12: 14).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는데 사용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축복을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배신행위다. 이 일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듣는다면, 다윗을 욕함과 동시에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욕을 먹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2)  다윗의 권력형 범죄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 온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을  믿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에서부터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제 본격적으로 이방선교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왕이 다 망쳐 먹은 것이다. 다윗도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권력자의 생각에는 그저 조그만 일탈(逸脫 )이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개미구멍이 되었다. 즉 천장지제 궤자의혈(千丈之堤 潰自蟻穴)이다.


          IV.    이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1. 다윗은 회개했다. 그리고 용서받았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하고 회개한다. 그러자 나단은 “하나님께서 왕을 용서하셨다. 따라서 왕은 죽지는 않을 것이다”고 대답한다(삼하 12: 13).  만약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그를 죽였을 것이다. 다윗은 건성으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를 원했다(시 51편).

  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혹독하였다. 

  1) 첫째, 다윗의 왕권을 박탈하셨다. 그것도 아들의 반란을 통하여….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합당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하나님이 주신 왕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했기에 다 몰수하신 것이다.

  2) 둘째, 다윗이 범죄한 그대로,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후처들을 성폭행한다. 아무도 막지 못했다. 심은대로 거두었다(갈 6 : 7). 

  3) 셋째, 다윗 집안의 죄악의 뿌리가 드러났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일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너희가
              어두운 데서 한 말도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속삭인 말도 옥상에서 큰 소리로 전파될 것이다"(눅 12: 2-3).
 
  4) 넷째,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셨다.  연대책임이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다고....
   

        V.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1. 역대기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1)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역대기에서는 이처럼 중대한 사건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역대기는 그런 책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국가재건의 근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국가재건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다윗언약(the Davidic Covenant)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너의 왕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만약 너와 너의 후손들이 범죄하면 벌을 주겠지만, 나의 은혜는 거두지 않겠다”(삼하 7: 8-16).

 2) 그런데 다윗의 중대한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사람들이 읽게 되면, 가뜩이나 힘이 빠진 사람들을 더 힘 빠지게 만들 것이 뻔하므로, 굳이 밝혀서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미래를 위해 더 나은 판단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2. 사무엘서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사무엘하는 다윗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었다.  다윗처럼 힘있는 사람도 범죄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선지자적인 입장에서 기록했다. 후세의 백성이나 왕들은 이 사실을 알고 다윗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를 보는 열왕기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왕조실록을 기록하듯이 왕들의 잘 잘못을 하나님의 눈으로 기록했다. 죄를 정확히 회개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3. 오늘 우리의 관점은 무엇인가?

  1)  교회안에서는 묻혀 버리는 밧세바 신드롬

    밧세바 신드롬은 교회안에서 이상하게도 너무 쉽게 묻혀버린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잘 할려고 하다가 실수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자.

    "지금 이 중대한 시기에 이 문제를 터트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될 것이고, 교회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성도들이 받을 상처는 누가 책임지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자".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절주절... ". "역대기의 정신을 봐라. 미래를 위해서는 덮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이상하게도 밧세바 신드롬에 걸린 사람들의 이러한 주장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라면 마땅히 처벌받고 사표를 내야 함에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버티고 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교단의 재정을 수십 억 축을 내도 처벌받지 않는다. 성적 스캔달이 있어도 흐지부지 된다. 선거 부정을 해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권력의 남용은 아예 법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처벌하기 힘들다. 끼리끼리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 버렸다.
   

 2) 회개하면 끝인가?

    크리스찬들은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이다. 용서를 받으면 어떠한 처벌도 없을 것이다"는 믿음을 상식처럼 가지고 있다. 과연 성경에 근거가 있을까?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회개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즉 말로만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졌다. 강제로 빼앗은 것의 네 배를 갚았다 (눅 19: 8-9). 이것은 구약의 배상의 원칙 따라서 했다(출 22: 1-5). 속건제(trespass offering)의 원칙도 그러하다.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보상을 하고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화해로 끝맺음을 해야 한다(레 6: 1-7).

  3) 하나님이 이미 용서했는데, 네가 뭔데?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했는데 네가 왜 그래?" 라는 말이 한국드라마에서 한국교회를 오히려 훈계하는 클리세(cliché)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신앙은 점점 자기방어적이 되어 간다. 회개에 대한 오해가 그것을 부추긴다. 특히 구원론에 대한 오해및 오용이 신앙의 윤리적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구원받았다. 그래서 천국에는 갈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비록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자신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갈 6: 7).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으로 쓰시는 자들의 잘못을 더욱 정확하게 다루신다(히 12:6).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부터 심판하신다(벧전 4:17).
 
 4) 권력형 범죄의 후유증은 너무 크다

    권력형 일탈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다윗의 잘못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죽어 나갔던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밧세바는 왕후가 되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걸로 다윗의 범죄는 종결되었을까? 해피엔딩이 되었을까? 아니다. 이 사건은 미해결(未解決), 미완(未完)의 상태로 후유증이 컸다. 

    밧세바는 자기 남편을 죽인 살인자와 살면서 행복했을까? 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을까? 그래서 밧세바가 더욱 정치적이 되지 않았을까? 솔로몬은 정서적으로 온전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가 나중에 타락한 것은 다윗의 범죄와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까?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구이며 뛰어난 참모였다(삼하 16:23). 그런 그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의 편이 아닌 압살롭의 편에 섰다. 그는 왜 다윗을 배신했을까? 아니다. 다윗이 먼저 친구인 아히도벨을 배신한 것이다. 믿었던 친구가 손녀의 가정을 가정을 풍지박산 내고서도 사과 한 마디 없이 권력으로 묻어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결코 잊지도 았았을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다윗을 심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압살롬의 편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압살롬을 부추겨서 다윗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삼하 16-17장). 

    만약 다윗이 친구인 아히도벨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고, 화해를 했더라면, 이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윗 자신도 선지자 나단의 말을 듣고 분개하면서, "남의 암양을 빼앗은 경우에는 4배로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삼하 12: 5-6).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성경을 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1)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역대기보다 사무엘서가 먼저 기록되었다. 역대기의 기자는 이미 사무엘하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역대기의 기록은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의 충분한 역사적 반성위에서 된 것이다. 단순히 잘못을 덮은 것이 아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국가가 무너지고, 70년이나 포로생활을 한 것이 자신들의 죄의 대가임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훈련을 받고 돌아왔던 것이다. 역대기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쓰여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역대기를 읽으면서 국가를 재건한 것이다.

  2)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다윗의 범죄 사건을 역대기의 관점만 강조한다면, 사람들은 역사의 반성을 진심으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되풀이 하는 길로 가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축소시키려는 뜻이 전혀 없다. 다만 '심은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용서'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왜곡하는 것이 안타깝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쓰라린 것이므로.
   
  3) 대형화 된 교회도 많다. 대형화 된 선교단체도 많다. 대형화 된 기독교 사업체도 많다. 교단에 점점 힘이 집중된다. 이런 곳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다. 이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의 남용및 사유화를 하게 되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나아가서 선교의 문이 막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한국 교회는 이미 충분히 그런 일을 겪었고, 그 후유증 속에서 밟히는 소금처럼 되어 간다.

  4) 힘이 집중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밧세바의 신드롬이 생겨난다. 권력에 의한 범죄는 하나님이 극혐하신다. 왜 밧세바 신드롬을 성경은 단순한 성범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사유화 한 것이라고 강변하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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