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6) 신사참배와 가야바의 논리(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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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17회 작성일 24-01-1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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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교회를 지키려고 그랬다? 

  1.  해방이후 평북노회 주최로 열린 목회자 연수회가 평북 선천에서 개최되었(1945년 11월 14일). 이 때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신사 참배한 목회자들은 2개월 자숙하자”는 안건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7년 전 신사참배를 강행한 장본인 홍택기 목사는 그 안건에 반대하면서 소위 ‘홍택기의 논리’를 폈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밖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거나 혹은 은퇴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짊어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지 누구의 강요에 의해 결정될 사항은 아니다". 
 
  2. 홍택기의 주장은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과연 진실일까? 신사참배를 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교회를 지켰다는 그의 말은 진실일까? 그런 일을 하는 그들이 정말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순교한 사람들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까? 정말로 하나님만이 이 일의 판단자이실까?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것이다.

  3.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더라면 한국교회는 전부 폐쇄되고, 신앙의 맥이 끊어졌을까? 10만 명의 학생들을 보유한 미션스쿨은 폐교되고, 학생들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 했을까? 그리하여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교회를 지키고 양떼를 먹이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인가?


        II. 교회를 지키려고 신앙을 버렸다?

    1. "홍택기 목사가 지키고자 했던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의 건물인가, 교인들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자리인가? 그는 정말로 예수에 대한 진실한 신앙을 지키고 싶었을까? 그래서 신사참배를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고 반드시 신앙을 지키고, 교인들에게 바른 신앙을 가르치려고 했을까?

    홍택기 목사는, 자신의 섬기는 교회에 교인이 거의 없고, 교회건물도 없고, 사례를 받는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교회를 지키려고 했을까?

  2. 홍택기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보면 "교회를 지키려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교회는 신앙을 버린 교회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신실한 관계가 아닌가? 신앙을 버린 교회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버린 것이다. 홍택기는 자신의 지위, 수입, 그리고 명예를 위하여, 또한 두려움에 굴복한 나머지,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인 것이다. 한국교회 전체의 신앙을 변질시킨 것이다.

  3. 그의 논리는 가야뱌의 논리의 아류이다. 가야바는 성전과 유대교를 지키려고 로마와 타협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죽였다. 홍택기는 건물을 지키려고 건물의 기초를 허물어 버린 격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이 당시는 물론, 일제가 물러간 다음에도 홍택기의 논리를 따랐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외압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다.
 
  4.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여전히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성장했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북한 교회는 공산당에도 굴복하였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남한의 교회는 성공과 번영에 굴복하였다. 이것이 기초가 무너진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III.  가야바의 추종자가 된 한국교회

  1. 사실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굴복했던 사람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목사든지 장로든지, 이들은 그 대가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후 지금까지 교회를 실제로 이끌어 온 것은 이들이었다. 결코 순교자의 그룹이 아니었다. 홍택기의 논리, 즉 가야바의 논리가 여전히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2. 아마도 한국교회가 전쟁후에 초고속 성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신사참배에 대한 좀 더 깊은 반성과 회개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좀 더 영적이고 신앙적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교회 역사상 드물게 폭발적 성장을 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라는 새 마을 운동의 슬로건처럼 한국교회는 더 이상 고난당하는 교회가 아니라 번영하는 힘 있는 교회가 되었다. 더 이상 신사참배를 둘러싼 논란에 머물러 있을 정서가 아니었다. 의와 정의를 세울 여유가 없었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이 때에 빨리 교회당을 짓고, 조직을 갖추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3.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처럼 그들이 신사참배를 했어도, 회개를 하지 않았어도, 교회만 성장시키면 면제부를 받았다. 아무리 말씀대로 살면서 의와 정의를 추구해도, 10년이 지나도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교회성장은 성경의 말씀보다 더 권위있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4.  나는 한국교회안에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great revival)” 에 관한 접근 방식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 한다. 평양 대부흥의 본질은 회개였다. 길선주 장로의 회개가 시발점이 되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한 교회에 부흥은 결과적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부흥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에만 촛점을 맞춘다. "회개 - 성령충만 - 성장"이라는 공식이 생겨버렸다. 회개도 성령충만도 성장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하나님께는 언제쯤이나 돌아갈 수 있을까?

  교회성장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사람들은 목적지를 묻지 않는다.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그토록 바라던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속에서 어떻게 빛이 될 수 있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애써 이룩한 양적 성장마저 무너지고 있다. 

  5. 나는 교회와 신앙속에 들어 온 가야바의 논리에 어떻게 사람들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맹목적인 추종자가 되었는지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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