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5) 신사참배와 가야바의 논리(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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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68회 작성일 24-01-17 13:55본문
I. 신사참배(神社參拜)는 우상숭배가 아니다?
1. 한국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10일 오전, 제 27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사회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곧 바로 단체로 평양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동시에 다음과 같이 성명서를 발표했다(카톨릭 교회는 1936년에, 감리교회는 1937년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昭和)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2. 성명서를 보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 이므로 국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II.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다르고 있다.
1.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오노(大野) 학무과장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간단명료한 것이다. 신사참배는 국가적인 의식이지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식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일본 영토 안에서 일본 국가의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헌법에도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많은 공헌이 있는 기독교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폐교한다고 하는 것은 당국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하여 폐교하고 선교사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당국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도 중에서도 가장 구파인 천주교에서 3년 전에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로마 교황의 특사가 와서 원만히 해결하고 국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국가의식인 신사참배 문제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35년 12월 1일).
2.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미션스쿨을 폐교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미션스쿨 학생수가 10만이 넘었다. 어떻게 키운 학교인가? 뿐만아니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지켜온 교회인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버텨내지 못 했다.
3.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앞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신임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설교했다. 그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뜻대로”였고, 성경본문은 히브리서 10: 5-7, 요한복음 4:34이었다. 내용은 각각 “하나님이시여, 보십시오. 나에 관해 율법책이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어서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장을 전국교회로 발송했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III. 주기철은 문제의 목사다?
1. 장로교회 평양노회는 1939년 임시회의를 열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다. 이듬 해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는 강제 페쇄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은 대부분 면직, 해임, 혹은 스스로 목사직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교회안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들의 가족들은 교회내에서도 동정을 받지 못했다. 생계마저 어려웠다.
2. 당시의 일반 신문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보도 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1939년 12월 20일). "문제의 목사는 파면하고 신사참배를 실현키로". 즉 주기철 목사는 “문제의 목사”가 되어 버렸다. 그는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문제아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은 문제아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분위기는 일관되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다.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에 불경하는 것이요, 권위에 순종하라는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1. 한국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10일 오전, 제 27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사회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곧 바로 단체로 평양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동시에 다음과 같이 성명서를 발표했다(카톨릭 교회는 1936년에, 감리교회는 1937년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昭和)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2. 성명서를 보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 이므로 국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II.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다르고 있다.
1.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오노(大野) 학무과장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간단명료한 것이다. 신사참배는 국가적인 의식이지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식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일본 영토 안에서 일본 국가의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헌법에도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많은 공헌이 있는 기독교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폐교한다고 하는 것은 당국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하여 폐교하고 선교사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당국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도 중에서도 가장 구파인 천주교에서 3년 전에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로마 교황의 특사가 와서 원만히 해결하고 국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국가의식인 신사참배 문제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35년 12월 1일).
2.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미션스쿨을 폐교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미션스쿨 학생수가 10만이 넘었다. 어떻게 키운 학교인가? 뿐만아니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지켜온 교회인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버텨내지 못 했다.
3.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앞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신임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설교했다. 그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뜻대로”였고, 성경본문은 히브리서 10: 5-7, 요한복음 4:34이었다. 내용은 각각 “하나님이시여, 보십시오. 나에 관해 율법책이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까?
이어서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장을 전국교회로 발송했다.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 천만의 행동이다. 이런 비상 시국하에서 만일에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III. 주기철은 문제의 목사다?
1. 장로교회 평양노회는 1939년 임시회의를 열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를 면직했다. 이듬 해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는 강제 페쇄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은 대부분 면직, 해임, 혹은 스스로 목사직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교회안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들의 가족들은 교회내에서도 동정을 받지 못했다. 생계마저 어려웠다.
2. 당시의 일반 신문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보도 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1939년 12월 20일). "문제의 목사는 파면하고 신사참배를 실현키로". 즉 주기철 목사는 “문제의 목사”가 되어 버렸다. 그는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문제아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은 문제아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분위기는 일관되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다.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에 불경하는 것이요, 권위에 순종하라는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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