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4) 화해는 불가능했다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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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83회 작성일 24-01-16 23:48본문
V. 그렇다면 정말로 예수와 가야바의 갈등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인가?
1. 있다. 무엇인가? 가야바가 회개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야바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할까? 예수는 가야바가 회개할 때까지 계속 외친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러면 충돌이 더욱 심해지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어야 할까? 아니다. 계속 외쳐야 한다. 자신의 희생과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는 그렇게 했다.
2. 그렇지만 예수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어떠한 언행도 하지 않았다. 사회의 안정을 헤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야바가 그렇게 생각하고 여론몰이를 했을 뿐이다.
예수는 그들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마 23: 2-3)
가야바가 부하들을 보내 자신을 체포할 때도 말했다. “내가 열 두 군단(legions)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해서 이들을 뒤집을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릴 때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했다.
3. 그렇다고 예수가 그들의 행동을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끝가지 그들의 잘못 된 행동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요 18: 36).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요 18: 37).
예수는 의와 정의가 바로 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 나라는 여론이나 물리적 힘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운다. 이를 위해 예수는 진리를 외친다. 진리대로 행동한다.
4. 이러한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막 4: 30-32).
5. 예수의 대안: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바로 가야바의 리더십을 몰아내고 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자 결과이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심부름꾼이다. 가야바는 심부름꾼인 교회를 주인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아닌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된 기독교왕국(Chirstedom)이 탄생한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가야바와 그의 추종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회개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예수처럼 회개를 외치고, 의와 정의를 세우며 나아가야 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 15).
그럴수록 가야바는 말한다. 전체의 안정과 유익을 위해서 의의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완곡어법을 사용해야 한다?
VI. 맺는 말: 먼저 시험을 통과하라
1. 예수의 주장과 가야바의 주장은 '화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평화를 위해 타협을 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가야바가 회개해야만 해결된다. 그렇지만 가야바는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외쳤다. 결국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나는 교회안에서 "좋은 게 좋다''는 사회적 통념에 기초해서, 예수와 가야바 사이에 화해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수 없이 보아왔다. 의와 정의가 무너진 곳에 화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탄의 속임수다. 물론 인간이 예수처럼 정확하게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외치거나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더욱 더 의와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의와 정의를 외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처럼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아직 통과하지 못 해서 그렇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통과하지 못했으면 십자가를 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많은 사역자들이 시험을 통과하지도 않은 채 주의 일을 한다. 그러다가 사탄이 먹을 거리를 던져 유혹하면 너무나 쉽게 굴복한다. 그래서 예수처럼 살지도, 외치지도 못하고 흉내만 낸다. 그러다가 결국 사탄의 하수인, 가야바의 길로 간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할 수록 그 일은 사탄의 일이 된다. 이상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가야바가 열심히 일하듯이.
2. 지난 2 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예수의 원칙(Jesus’ principle)보다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의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는 가야바의 논리(Caiaphas’ logic)가 우선시되어 왔다. 대단히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요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의 교회와 크리스찬은 예수의 업적은 받아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무시한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따르지는 않는다.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가야바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가야바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교회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하여 몇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있다. 무엇인가? 가야바가 회개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야바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할까? 예수는 가야바가 회개할 때까지 계속 외친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러면 충돌이 더욱 심해지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어야 할까? 아니다. 계속 외쳐야 한다. 자신의 희생과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는 그렇게 했다.
2. 그렇지만 예수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어떠한 언행도 하지 않았다. 사회의 안정을 헤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야바가 그렇게 생각하고 여론몰이를 했을 뿐이다.
예수는 그들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마 23: 2-3)
가야바가 부하들을 보내 자신을 체포할 때도 말했다. “내가 열 두 군단(legions)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해서 이들을 뒤집을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릴 때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했다.
3. 그렇다고 예수가 그들의 행동을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끝가지 그들의 잘못 된 행동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요 18: 36).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요 18: 37).
예수는 의와 정의가 바로 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 나라는 여론이나 물리적 힘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운다. 이를 위해 예수는 진리를 외친다. 진리대로 행동한다.
4. 이러한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막 4: 30-32).
5. 예수의 대안: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바로 가야바의 리더십을 몰아내고 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자 결과이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심부름꾼이다. 가야바는 심부름꾼인 교회를 주인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아닌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된 기독교왕국(Chirstedom)이 탄생한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가야바와 그의 추종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회개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예수처럼 회개를 외치고, 의와 정의를 세우며 나아가야 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 15).
그럴수록 가야바는 말한다. 전체의 안정과 유익을 위해서 의의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완곡어법을 사용해야 한다?
VI. 맺는 말: 먼저 시험을 통과하라
1. 예수의 주장과 가야바의 주장은 '화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평화를 위해 타협을 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가야바가 회개해야만 해결된다. 그렇지만 가야바는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외쳤다. 결국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나는 교회안에서 "좋은 게 좋다''는 사회적 통념에 기초해서, 예수와 가야바 사이에 화해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수 없이 보아왔다. 의와 정의가 무너진 곳에 화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탄의 속임수다. 물론 인간이 예수처럼 정확하게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외치거나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더욱 더 의와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의와 정의를 외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처럼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아직 통과하지 못 해서 그렇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통과하지 못했으면 십자가를 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많은 사역자들이 시험을 통과하지도 않은 채 주의 일을 한다. 그러다가 사탄이 먹을 거리를 던져 유혹하면 너무나 쉽게 굴복한다. 그래서 예수처럼 살지도, 외치지도 못하고 흉내만 낸다. 그러다가 결국 사탄의 하수인, 가야바의 길로 간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할 수록 그 일은 사탄의 일이 된다. 이상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가야바가 열심히 일하듯이.
2. 지난 2 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예수의 원칙(Jesus’ principle)보다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의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는 가야바의 논리(Caiaphas’ logic)가 우선시되어 왔다. 대단히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요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의 교회와 크리스찬은 예수의 업적은 받아들이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무시한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따르지는 않는다.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가? 가야바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가야바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교회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하여 몇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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