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3) 왜 사랑으로 품지 못 했을까(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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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87회 작성일 24-01-1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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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예수는 자신의 표현과 행동을 좀 더 온건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1.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서 폭력적인 소동을 기어이 일으켜야 했을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비난만 더 거세어졌다. 오늘 날 의와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처럼.

        “갈릴리 촌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야? 뭐 성전을 허물고 사흘안에 다시 짓는다고?”
        “모세의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신학교도 못 나온 주제에 네가 샴마이나 힐렐보다 율법을 더 잘 아냐?”
        “어디 거룩한 성전에 와서 폭력을 휘둘러? 환전하고 짐승 파는 직원들이 다 예배를 돕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데 수고한다는
                말도 없이, 뭐 강도라고?”
        “우리의 스승들에게 ‘회칠 한 무덤’같다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인격 자체가 되먹지 않았어, 저게 어디 선지자야?”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 그리고 네 제자들이나 잘 단속해라”.
 
 2.  ‘메시야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이라고 불리우는 예수의 선포를 보자.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 18-19).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 '사역의 방향과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기존 질서를 뒤집어버리는 혁명적인 내용이다. 중대한 도전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감옥에 가둔 사람들을 억울한 사람이라며 풀어준다고?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해(jubilee)"를 실현하겠다고? 이 말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리는 사회의 리셋 버튼(reset button)을 누르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조용히 말씀이나 가르치고 기도나 하지? 왜 길거리로 뛰쳐 나가서 길길이 날뛰는가? 마치 사람들의 인기를 끌려는 얄팍한 사회운동가처럼!  그러니까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거지?

3. 우리는 제자 요한의 입을 통하여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요 2: 16-17, 참고, 시 69:9).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헬라어, 젤로스(Ζῆλος)는 사실 질투를 의미한다. 성전에서의 환전과 매매행위를 목도하면서, 예수는 그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사탄의 실체를 보았다. 하나님의 집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니! 하나님을 위한 질투(열정)가 불타올랐다.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불러올 정도로! 남들이 교양이 없다고 비난해도, 과격하다고 욕을 해도, 자신의 이미지가 추락을 해도, 이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예수는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요한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말하고 있다. 예수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다.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 의와 정의를 세운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의와 정의를 세우기에 열정을 갖고 계시는지를 대신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도 의와 정의를 위하여 냉철한 머리뿐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사람이라면 마땅히 의를 위하여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IV.        예수는 왜 사랑으로 가야바를 품지 않았을까?

 1.  예수는 사랑으로 가야바를 품어서 바른 길로 인도했어야 하지 않을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용서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너를 고소하려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 너는 도중에 그와 재빨리 타협하라”(마 5: 25a). 그런데 왜 자신은 가야바가 자신을 고소하는 줄 알면서도 재빨리 타협하지 않았을까?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 대어라”(마 5:39b). 그런데 왜 자신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판했는가?

 2.  여기서 다른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예수는 가룟 유다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왜 막지 않았을까? 그대로 두면 자신도 죽고, 제자도 지옥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말렸어야지! 그냥 두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으로서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다시 질문해 보자. 만약 예수가 타일렀다면 유다가 들었을까? 이미 유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시작했다.    복음서의 기록들을 보자. 요한은 최후의 만찬 때, “악마가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 13: 20), 유다가 “예수의 빵 조각을 받자, 사탄에 그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보면 이미 그 전에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고,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기려고 갔다(눅 22: 2-3). 유다의 배신은 한 순간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잉태한 오랜 불만과 욕망의 결과였다. 유다의 불만과 욕심이 사탄을 불러들였고, 사탄은 그의 욕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예수가 어찌 유다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말릴 수가 없었다. 말려도 듣지 않았다면 거래 즉 타협을 했어야 할까? “네가 나를 넘겨주지만 않는다면, 너의 바람대로 십자가를 포기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너에게 재무장관 자리를 줄 께”라고 했어야 할까? 

 3. 그렇다면 유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가야바에게, 예수는 어떻게 다가가서 어떻게 타일렀어야 할까? 그는 자신의 분명한 의지와 판단을 가지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그는 마귀에게 지배당한다기 보다는 그가 오히려 마귀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예수가 사랑으로 품을 수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굴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조직의 수장이다.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말처럼,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어도 조직은 절대로 도덕적일 수가 없다”. 조직은 스스로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있다. 비록 그 조직이 종교단체라 하더라도. 

  4. 이러한 현실의 벽 앞에 선 예수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래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마 23: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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