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2) 화해할 수는 없었을까(I)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85회 작성일 24-01-16 23:21본문
I. 화해를 위해서 무엇을 양보할까
1. 아마도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니, 두 사람이 왜 화해를 해야 하는가? 예수가 인류의 대속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른 것인데, 예수 자신도 이를 위해 세상에 오신 것 아니었나? 그리고 가야바는 당연히 나쁜 놈이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 결과론적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자. 예수의 억울한 죽음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야바가 회개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한 것이 어찌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이 아닌가?
2. 교회안에서 목회자의 세습을 강행하려는 보수 세력과 세습을 반대하는 개혁 세력이 충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개혁 세력이 교회에서 축출당해 교회앞에서 피켓 들고 시위하고, 기존의 세력은 여론의 비난을 받고, 교인들의 관계는 멀어지고, 교회는 사람들에게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밟히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양쪽 모두 “교회를 잘 되게 하려고”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 하면서 기도만 할 것인가?
3. 상식적인 해결책은 ‘화해’이다. 대립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조금씩 내려 놓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수와 가야바는 무엇을 양보해야 할까? 과연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타협할 수 있었을까? 가야바는 자신의 이익을 조금 포기할 수 있었을까? 먼저 예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늘 사랑과 화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II.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타협할 수 있었을까?
1. 예수가 자신의 주장을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과격한 표현을 조금만 완곡어법으로 바꾸었더라면, 그래서 적대자들을 덜 자극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죽음에 이르는 것 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2. 예수는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주장했다. 의(義, tsedeq, righteousness)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및 '이를 위한 행동'을 의미한다. 정의(正義, mishpat, justice)는 의를 기초로 '한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 및 '이를 위한 올바른 재판과 분배'를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메시야가 오면 이 땅에 “의와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33:15).
3. 그렇다면 예수는 의와 정의를 얼마만큼 실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완전하게(100%) 실현해야 한다.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것(τελειος, teleios)을 요구받는다(마 5: 48).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셨다(창 17: 1).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다.
4. 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순위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만일 행동의 기준이 되는 말씀 자체의 왜곡과 타협이 발생하면, 의와 정의에 이르는 길이 파괴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사람사이의 바른 관계를 실현할 수 없다.
예수와 부자 청년의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마 19장). 예수는 말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라”. 그가 대답했다.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지만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에 왜곡과 타협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만든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버리는구나” 라고 탄식했다(막 7: 8-9). 율법을 그렇게나 중시하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의와 정의가 사라져 버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5. 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예수에 대하여 가야바는 타협을 요구했다. 반박과 회유, 그리고 협박도 했다. 가야바에게는 이러한 일이 자신의 신앙과 그다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하지 않는 예수를 꽉 막힌 인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마 5: 17).
6. 무슨 말인가?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1. 아마도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니, 두 사람이 왜 화해를 해야 하는가? 예수가 인류의 대속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른 것인데, 예수 자신도 이를 위해 세상에 오신 것 아니었나? 그리고 가야바는 당연히 나쁜 놈이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 결과론적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자. 예수의 억울한 죽음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야바가 회개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한 것이 어찌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는 것이 신앙인의 책임이 아닌가?
2. 교회안에서 목회자의 세습을 강행하려는 보수 세력과 세습을 반대하는 개혁 세력이 충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개혁 세력이 교회에서 축출당해 교회앞에서 피켓 들고 시위하고, 기존의 세력은 여론의 비난을 받고, 교인들의 관계는 멀어지고, 교회는 사람들에게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밟히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양쪽 모두 “교회를 잘 되게 하려고”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 하면서 기도만 할 것인가?
3. 상식적인 해결책은 ‘화해’이다. 대립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조금씩 내려 놓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수와 가야바는 무엇을 양보해야 할까? 과연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타협할 수 있었을까? 가야바는 자신의 이익을 조금 포기할 수 있었을까? 먼저 예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늘 사랑과 화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II.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타협할 수 있었을까?
1. 예수가 자신의 주장을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과격한 표현을 조금만 완곡어법으로 바꾸었더라면, 그래서 적대자들을 덜 자극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죽음에 이르는 것 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2. 예수는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주장했다. 의(義, tsedeq, righteousness)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및 '이를 위한 행동'을 의미한다. 정의(正義, mishpat, justice)는 의를 기초로 '한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 및 '이를 위한 올바른 재판과 분배'를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메시야가 오면 이 땅에 “의와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33:15).
3. 그렇다면 예수는 의와 정의를 얼마만큼 실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완전하게(100%) 실현해야 한다.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것(τελειος, teleios)을 요구받는다(마 5: 48).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셨다(창 17: 1).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다.
4. 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순위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만일 행동의 기준이 되는 말씀 자체의 왜곡과 타협이 발생하면, 의와 정의에 이르는 길이 파괴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사람사이의 바른 관계를 실현할 수 없다.
예수와 부자 청년의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마 19장). 예수는 말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라”. 그가 대답했다.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지만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에 왜곡과 타협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만든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버리는구나” 라고 탄식했다(막 7: 8-9). 율법을 그렇게나 중시하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의와 정의가 사라져 버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5. 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예수에 대하여 가야바는 타협을 요구했다. 반박과 회유, 그리고 협박도 했다. 가야바에게는 이러한 일이 자신의 신앙과 그다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하지 않는 예수를 꽉 막힌 인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마 5: 17).
6. 무슨 말인가?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