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1) 예수도 죽고 성전도 무너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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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3,002회 작성일 24-01-1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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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수, 십자가에 처형당하다.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요 19: 19-22)

  1.  사형집행자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목을 써서 붙였다. 로마의 반역자라는 조롱이다. 반역자에 대한 십자가 형벌은 당시의 관례였다. 그렇지만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죄목은 반역이 아닌 신성모독(blasphemy)이었다. 그러나 신성모독은 로마법 상 범죄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가야바는 예수를 반역자로 몰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도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것이 가야바의 주도면밀한 계획대로 되었다.

    그런데 가야바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목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예수 처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가야바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2.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하여 가야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1) 첫째, 로마의 손을 빌어 예수를 반역자로 처형함으로써 자신은 어떠한 법적 책임에서도 자유롭게 되었다. 군중들이 가야바를 비난할 근거를 없앤 것이다. 동시에 예수의 추종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언제든지 선례에 따라 반역죄로 처형할 수 있게 되었다.
 
  2)  둘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임을 유대인들에게 부각시킬 수 있었다.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이기 때문이다(신 21:23).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받고 용기를 내서 유대인에게 했던 말이 무었이던가?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행 2: 23b). 스승의 십자가 죽음이 그의 가슴에, 그리고 교회의 출발에 얼마나 부담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선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강조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은 사람을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욕하지 않고 오히려 주"라고 부른다(고전 12:3). 이미 유대인들이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낸 것이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을까? 어찌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예수가 저주받은 자가 아니다라는 반론을 넘어서 십자가 형벌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여 선교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즉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강조한다(갈 3:13). 따라서 자신은 예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대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증언한다(고전 1:22-23).

  3. 아무튼 가야바는 예수 죽이기를 통하여 성전 지키기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성전도 예수의 사후 40년 뒤에 철저히 무너지고 만다. 


              II.    성전도 무너졌다.
   
      "네 원수들이 너를 향해 둑을 쌓고 사방으로 너를 포위하여 너와 네 자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돌 하나도 그대로 남겨 두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찾아온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눅 19: 43-44)

  1. 예루살렘에 사는 어느 누구도 예수의 예언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왔다. 제1차 유대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AD 70년 4월 14일, 티투스(Titus)가 거느린 로마의 3개 군단(legions)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유월절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성안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수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로부터 9월 8일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 까지  5개월 동안, 이들은 꼼짝 없이 굶주림과 공포속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전안에는 유대인들간의 파벌싸움으로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평소 3만 명도 안 되는 인구가 살던 좁은 성안에 백 만명이나 갇혀 있으니 먹을 것이 동이 나서 동족간에 목숨을 건 탈취와 살육이 이루어졌다. 여기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명문 출신의 부유한 여자였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들이 약탈자가 되어 매일 그녀의 집에 와서 먹을 것과 재산을 빼앗아 갔다. 아무리 먹을 것을 숨겨두어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젖먹이 아들을 번쩍 치켜 들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 가련한 아가야. 내가 이 전쟁과 기근 속에서 누구를 위하여 너를 보호할까?... 강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이고 하직인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리고는 아들을 죽여 불에 구웠다. 반은 먹고 반은 감추어 놓았다.  음식 냄새를 맡은 약탈자들이 들이닥쳐 음식을 내어 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그녀는 먹다 남은 아들의 시체를 내어 놓았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3).

    2. 예루살렘 성전 건물이 불탄 것은 티투스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성전건물 만큼은 손 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열심당(熱心黨, Zealot)이 예루살렘 성전을 전쟁본부로 삼았기 때문에 성전이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들에게 "성전이 로마군인들에게 파괴되지 않도록 제발 성전 밖에서 싸우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성전에 불을 먼저 지른 것은 열심당이었다. 그들은 로마군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성전 회랑의 대들보와 지붕 밑에 역청과 수지로 가득 채운 다음에 후퇴하는 척 했다. 로마군인들이 들이닥치자 그들은 불을 질렀다. 로마 군인들은 불을 끄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와중에 화가 난 로마 병사 한 명이 불에 타던 나무 막대기를 성전의 본당 쪽으로 집어 던졌다. 삽시간에 불길이 본당을 삼켰다. 로마군인들은 물론, 놀란 열심당도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보고를 받고 달려온 티투스(Titus)가 아무리 진화작업을 지휘했지만 소용없었다(유대전쟁사 6:4-9).


        III.  비극이었다.
 
  1.  가야바는 자신의 사후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짐작했을까? 자신이 지은 것도 아닌 성전이지만 그래도 주인 행세를 하던 성전이었는데…. 정의를 희생시켜서라도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안전과 이익의 본거지가 이처럼 불에 타버리다니!

  2. 하나님이 다스리던 나라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런 일들을 저지르다니! 이런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3. 성전이 무너진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있다. 신앙과 국가를 다시 일으킬 힘을 잃어버렸다. 예수를 죽임으로 의와 정의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기초가 무너진 건물이 설 수 없는 것처럼, 의와 정의를 상실한 유대교는 존재기반을 상실했다. 동시에 유대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동족상잔과 외침으로 뿌리가 뽑혔다. 누가 어떻게 다시 유대교를 일으킬 것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리새파의 랍비,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가 당시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안의 허락으로 잠니아(Jamnia)에 학교를 열어서 율법을 가르치고 제자를 양성할 수 있었다. 유대교의 명맥이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환란중에서도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생존해 왔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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