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9) 탐욕, 종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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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06회 작성일 24-01-06 08:56본문
I. 욕심은 영적인 생명체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약 1:15)
1. 욕심을 생명체에 비유한다. 욕심을 품으면 자라나기 마련이다. 자라난 욕심은 죄라는 형태로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뱃속의 아기를 포기하는 어미가 없듯이, 사람도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다. 태어난 아기를 키우듯 태어난 욕심을 키운다. 죄가 된 욕심이 커지면 키워 준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키운 욕심에 먹힐 때까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욕심은 왕성한 식욕을 가진 포식자(捕食者)이다.
2. 욕심이 자라서 죄가 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점이다. 돈을 벌기 위해 환전과 매매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실제로 성전 마당으로 그 시설을 옮겨오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죄가 자라서 죽음을 낳는 시점은 언제인가? 자신들이 만든 제도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때이다. 이 때가 되면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돌이킬 수 없다. 욕심이 제도와 문화의 옷을 입고 나면 벗을 수가 없다. 이처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였어도 자신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욕심에게 먹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II. 탐욕이 종교가 되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이다”(골 3:5).
1. 양심의 가책과 사회적 제재로부터 벗어나 합법적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욕망을 신앙으로’ 만들었다. 신앙이 된 욕망은 전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가 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욕망도 채우고, 신앙도 과시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2. 가나안의 바알(Baal) 종교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성행위를 통해 땅에 비가 내리고 풍요로운 축복이 온다고 생각했다. 신들의 성행위를 자극해서 더 많은 풍요를 누리고 싶었다.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과 아세라 앞에서 스스로 성행위를 함으로 신들의 성행위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바알을 예배할 때의 성행위는 신앙의 증거가 된다. 오히려 칭찬받는다.
이처럼 욕망도 채우고 복도 받을 수 있는 바알 종교는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퍼져나갔다. 이성 간의 성행위 뿐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도 허용되었다. 이처럼 매력적인 종교가 어디에 있을까? 욕망의 바알 종교가 여호와 신앙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결과는 어찌되겠는가?
탐심(pleonexia)은 "더 많이 가질려는 마음"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차지하려는 마음이다. 그런데 탐심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함께 어울린다(골 3:5). 이런 욕망이 신앙과 종교의 옷을 입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餓鬼)가 된다. 즉 사람과 사회를 욕심의 아귀로 만든다.
III. 탐욕이 신앙을 바꾼다
“그는 아세라 여신상을 끌어내어 기드론 골짜기로 가지고 가 거기서 불태우고 그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그 재를 공동 묘지에 뿌렸다. 그는 또 성전 안에 있는 남창들의 숙소를 헐어 버렸는데 이 곳은 여자들이 아세라 여신을 위해 휘장을 짜는 곳이기도 하였다”(왕하 23: 6-7)
1. 유대 왕 요시아(Yoshia, BC 640-609)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아세라 여신상을 두고 우상숭배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남창들이 활약을 하다니…!
남창(男娼), 혹은 미동(美童)으로 번역된 이 말은 카데쉬(קדש, kadeshi), 즉 아세라에게 헌신한 "신성한 남자"를 뜻한다. 이들은 아세라 신전의 직원으로서 아세라를 예배하러 온 남자들에게 몸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서 카데쉬들의 숙소가 아세라 신전의 여사제, 케데샤(קדשה, kedesha)의 사무실과 함께 있었다. 성전안에 여신 아세라를 섬기는 천막이 있었고, 그곳에서 남창과 여창이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아세라 숭배자들에게 동성및 이성간의 성행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2. 젊은 개혁 군주 요시아는 작심하고 신앙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서른 한 살의 나이로 므깃도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의 군대와 싸우다가 죽어버린다. 네코 2세는 요시아의 아들 엘리야김(여호야김)을 이집트의 꼭두각시 왕으로 삼았다. 결국 유다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갱신되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국가마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3. 에스겔의 증언을 보면 요시아 이후의 종교적 혼합을 알 수 있다.
“내가 들어가 보았더니 온갖 기어다니는 것들과 부정한 동물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우상들이 벽 사방에 잔뜩 그려져 있었고, 그 앞에는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와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손에 향로를 들고 있었으며 그 향에서는 구름 같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겔 8: 10-1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안에서 자행되는 우상숭배의 현장을 보여주셨다. 우상숭배의 장본인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그 중심 인물은 야아사냐였다. 그는 사반의 아들이다. 사반은 요시아의 개혁을 도운 신실한 서기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아들이 중심이 되어 이집트의 점수를 따려고 성전을 우상숭배의 장소로 만들다니.... 제사장들의 일부가 반대를 했지만, 결국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우상숭배는 인간의 욕망, 즉 성적인 욕망, 경제적 욕망, 정치적 욕망, 혹은 자기 과시의 욕망을 신앙으로 미화시켜서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오히려 칭찬을 받으며 실현하기 위한 인간이 만든 수단이다. 이것이 여호와 신앙속에 스며 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위의 사건들이다. 나아가서 한번 스며든 신앙화 된 욕망은 그 생명력이 잡초처럼 끈질겨서 근절하기 어렵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다음,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일시적인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나지만, 가야바의 시대에 이르러 신앙이 된 욕망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에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이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약 1:15)
1. 욕심을 생명체에 비유한다. 욕심을 품으면 자라나기 마련이다. 자라난 욕심은 죄라는 형태로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뱃속의 아기를 포기하는 어미가 없듯이, 사람도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다. 태어난 아기를 키우듯 태어난 욕심을 키운다. 죄가 된 욕심이 커지면 키워 준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키운 욕심에 먹힐 때까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욕심은 왕성한 식욕을 가진 포식자(捕食者)이다.
2. 욕심이 자라서 죄가 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점이다. 돈을 벌기 위해 환전과 매매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실제로 성전 마당으로 그 시설을 옮겨오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죄가 자라서 죽음을 낳는 시점은 언제인가? 자신들이 만든 제도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때이다. 이 때가 되면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돌이킬 수 없다. 욕심이 제도와 문화의 옷을 입고 나면 벗을 수가 없다. 이처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였어도 자신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욕심에게 먹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II. 탐욕이 종교가 되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이다”(골 3:5).
1. 양심의 가책과 사회적 제재로부터 벗어나 합법적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욕망을 신앙으로’ 만들었다. 신앙이 된 욕망은 전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가 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욕망도 채우고, 신앙도 과시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2. 가나안의 바알(Baal) 종교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성행위를 통해 땅에 비가 내리고 풍요로운 축복이 온다고 생각했다. 신들의 성행위를 자극해서 더 많은 풍요를 누리고 싶었다.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과 아세라 앞에서 스스로 성행위를 함으로 신들의 성행위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바알을 예배할 때의 성행위는 신앙의 증거가 된다. 오히려 칭찬받는다.
이처럼 욕망도 채우고 복도 받을 수 있는 바알 종교는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퍼져나갔다. 이성 간의 성행위 뿐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도 허용되었다. 이처럼 매력적인 종교가 어디에 있을까? 욕망의 바알 종교가 여호와 신앙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결과는 어찌되겠는가?
탐심(pleonexia)은 "더 많이 가질려는 마음"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차지하려는 마음이다. 그런데 탐심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함께 어울린다(골 3:5). 이런 욕망이 신앙과 종교의 옷을 입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餓鬼)가 된다. 즉 사람과 사회를 욕심의 아귀로 만든다.
III. 탐욕이 신앙을 바꾼다
“그는 아세라 여신상을 끌어내어 기드론 골짜기로 가지고 가 거기서 불태우고 그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그 재를 공동 묘지에 뿌렸다. 그는 또 성전 안에 있는 남창들의 숙소를 헐어 버렸는데 이 곳은 여자들이 아세라 여신을 위해 휘장을 짜는 곳이기도 하였다”(왕하 23: 6-7)
1. 유대 왕 요시아(Yoshia, BC 640-609)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아세라 여신상을 두고 우상숭배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남창들이 활약을 하다니…!
남창(男娼), 혹은 미동(美童)으로 번역된 이 말은 카데쉬(קדש, kadeshi), 즉 아세라에게 헌신한 "신성한 남자"를 뜻한다. 이들은 아세라 신전의 직원으로서 아세라를 예배하러 온 남자들에게 몸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서 카데쉬들의 숙소가 아세라 신전의 여사제, 케데샤(קדשה, kedesha)의 사무실과 함께 있었다. 성전안에 여신 아세라를 섬기는 천막이 있었고, 그곳에서 남창과 여창이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아세라 숭배자들에게 동성및 이성간의 성행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2. 젊은 개혁 군주 요시아는 작심하고 신앙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서른 한 살의 나이로 므깃도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의 군대와 싸우다가 죽어버린다. 네코 2세는 요시아의 아들 엘리야김(여호야김)을 이집트의 꼭두각시 왕으로 삼았다. 결국 유다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갱신되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국가마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3. 에스겔의 증언을 보면 요시아 이후의 종교적 혼합을 알 수 있다.
“내가 들어가 보았더니 온갖 기어다니는 것들과 부정한 동물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우상들이 벽 사방에 잔뜩 그려져 있었고, 그 앞에는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와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손에 향로를 들고 있었으며 그 향에서는 구름 같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겔 8: 10-1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안에서 자행되는 우상숭배의 현장을 보여주셨다. 우상숭배의 장본인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그 중심 인물은 야아사냐였다. 그는 사반의 아들이다. 사반은 요시아의 개혁을 도운 신실한 서기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아들이 중심이 되어 이집트의 점수를 따려고 성전을 우상숭배의 장소로 만들다니.... 제사장들의 일부가 반대를 했지만, 결국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우상숭배는 인간의 욕망, 즉 성적인 욕망, 경제적 욕망, 정치적 욕망, 혹은 자기 과시의 욕망을 신앙으로 미화시켜서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오히려 칭찬을 받으며 실현하기 위한 인간이 만든 수단이다. 이것이 여호와 신앙속에 스며 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위의 사건들이다. 나아가서 한번 스며든 신앙화 된 욕망은 그 생명력이 잡초처럼 끈질겨서 근절하기 어렵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다음,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일시적인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나지만, 가야바의 시대에 이르러 신앙이 된 욕망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에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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