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진실(7) 바울에 대한 오해(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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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91회 작성일 24-02-29 19:01본문
I. 예수의 가르침은 바울의 이신칭의와 다른가?
1. 이제까지 마태복음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불법자, 가라지, 그리고 염소와 같은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행위’를 하지도 않을 뿐더러 회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를 믿어도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한다.
2. 그렇다면 개신교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이다(엡 2:8, 롬 3:30).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가? 그것은 '예수및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다.
II.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 8: 1-4, 새번역).
1. 이신칭의 가르침의 핵심 부분 중에서도 결론에 해당한다. 이신칭의의 목적은 바로 “율법의 요구(dikaioma)”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무엇인가? 율법대로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가 폐지하기를 원했던 장로들의 유전(tradition)과 같은 율법의 인간적 해석이 아니다(마 15:2).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우리다. 언제 어디에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2. 율법을 모를 때는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율법을 안 다음부터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고,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침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롬 7:12). 다만 문제는 죄로 물든 인간이 율법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 이제는 율법대로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가능하다(갈 5: 16). 따라서 율법의 요구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갈 5: 22-23).
3. 아니, 이것이 정말 이신칭의를 주장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여기서 칭의라는 것이 "의의 전가(imputation)"냐, "의의 주입(infusion)"이냐는 신학적인 논쟁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율법의 요구대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날,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도 천국 가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 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십자가의 강도를 구원의 모델로 삼고 싶은가? 부끄러운 일이다.
III.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 17-18).
예수의 목적은 율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마 5: 48). “완전해지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율법의 요구”이다(롬 8:4). 실제로 예수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다(롬 10:4). 그리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셨다(히 12:2).
IV. 야고보의 설명을 들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약 2: 17-20, 새번역).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만일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 마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따르지는 않는다(약 2: 19). 이단의 가르침도 이러하다.
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의롭다고 증명된 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으로 완전하게 된다(약 2: 22).
바울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설명한다(롬 4: 3, 창 15: 6). 여기서 "여김을 받다(logizomai)"는 것은 실제로 의롭지는 않지만 그렇게 간주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믿음의 출발점을 이야기 한 것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음의 출발점을 강조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쉽고도 분명하게 알려야 하는 선교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약 2: 24). 야고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은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마음대로 행동해도 천국에 간다”는 마귀적인 주장이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자신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이렇게 악용하는 율법폐기론자들(antinomianism)을 대단히 경계했다(롬 6: 1-5).
4. 야고보는는 기생 라합의 예를 들어 다시 한번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고백을 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정탐꾼들을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설명한다(약 2: 25-26).
V. 칼빈의 부연 설명
존 칼빈(J. Calvin)도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행위의 도움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논증하며, 야고보는 선행이 없는 자들은 의로운 자들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야고보의 의도를 생각하면 모든 난제가 해결된다. 야고보의 의도는 다만 헛되이 믿음이 있는 체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선행을 멸시하는 자들의 악한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 17: 12).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야고보서를 평가절하 했다는 오해가 있다. 실제로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는 "야고보서는 다른 성경들과 비교했을 때 지푸라기 같다.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 했다. 그래서 그의 독일어 번역 신약성경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제외했다(1522). 그러나 그는 신구약 전체 번역본에서는 야고보서를 편입시켰다(1534). 이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행위만의 구원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의 일치및 균형'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VI. 믿음은 이런 것이다
1.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마 10:32). 신앙의 박해 시대에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는 고백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행위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 10:10)는 바울의 설명도 같은 맥락에 있다. 네로(Nero) 황제 때, 로마에 사는 크리스찬들에게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Credo in Jesum Christum)”는 고백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 폴리갑(Policap, AD 80-165)의 고백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화형을 집행하는 서머나 총독 스타티우스(Statius) 앞에서 고백했다. “내가 86년 동안 살아오도록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으신데 어찌 내가 지금 주님을 부인한단 말이오”.
요사이는 잔치 분위기 속에서 세례식을 한다. 꽃다발, 찬양, 기념사진, 기념선물, 축하와 격려속에서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의미있는 순간이 있을까? 그렇지만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참된 믿음은 앎과 느낌을 넘어서는 삶의 변화이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2. 사람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행함을 보고 구원을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8). 실제로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사 64:6).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갈 2:16).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by grace through faith)”만 구원을 얻는다.
그렇지만 믿음은 반드시 의로운 행위를 낳게 된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마 7: 17-19). 의로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나 가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6).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결코 아니다. 입술만의 믿음, 마음만의 믿음을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멸망의 길이다(마 7:13).
"지금은 이렇게 살아도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에 가면 된다"는 식의 믿음은 마귀적(diabolical)이다.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대충 살아도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최선을 다해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고 힘을 써야 한다.
이신칭의를 가르친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빌 2:12), 그리고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하면서(고전 9:2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빌 3: 14).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약속하신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였다(빌 3:11).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본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1. 이제까지 마태복음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불법자, 가라지, 그리고 염소와 같은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행위’를 하지도 않을 뿐더러 회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를 믿어도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한다.
2. 그렇다면 개신교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이다(엡 2:8, 롬 3:30).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가? 그것은 '예수및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다.
II.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 8: 1-4, 새번역).
1. 이신칭의 가르침의 핵심 부분 중에서도 결론에 해당한다. 이신칭의의 목적은 바로 “율법의 요구(dikaioma)”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무엇인가? 율법대로 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가 폐지하기를 원했던 장로들의 유전(tradition)과 같은 율법의 인간적 해석이 아니다(마 15:2).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우리다. 언제 어디에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2. 율법을 모를 때는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율법을 안 다음부터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력이 생기고,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침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롬 7:12). 다만 문제는 죄로 물든 인간이 율법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 이제는 율법대로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가능하다(갈 5: 16). 따라서 율법의 요구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갈 5: 22-23).
3. 아니, 이것이 정말 이신칭의를 주장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여기서 칭의라는 것이 "의의 전가(imputation)"냐, "의의 주입(infusion)"이냐는 신학적인 논쟁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율법의 요구대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날,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도 천국 가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 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십자가의 강도를 구원의 모델로 삼고 싶은가? 부끄러운 일이다.
III.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 17-18).
예수의 목적은 율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마 5: 48). “완전해지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율법의 요구”이다(롬 8:4). 실제로 예수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다(롬 10:4). 그리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셨다(히 12:2).
IV. 야고보의 설명을 들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약 2: 17-20, 새번역).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만일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 마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따르지는 않는다(약 2: 19). 이단의 가르침도 이러하다.
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의롭다고 증명된 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으로 완전하게 된다(약 2: 22).
바울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설명한다(롬 4: 3, 창 15: 6). 여기서 "여김을 받다(logizomai)"는 것은 실제로 의롭지는 않지만 그렇게 간주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믿음의 출발점을 이야기 한 것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음의 출발점을 강조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쉽고도 분명하게 알려야 하는 선교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약 2: 24). 야고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은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마음대로 행동해도 천국에 간다”는 마귀적인 주장이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자신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이렇게 악용하는 율법폐기론자들(antinomianism)을 대단히 경계했다(롬 6: 1-5).
4. 야고보는는 기생 라합의 예를 들어 다시 한번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고백을 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정탐꾼들을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설명한다(약 2: 25-26).
V. 칼빈의 부연 설명
존 칼빈(J. Calvin)도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행위의 도움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논증하며, 야고보는 선행이 없는 자들은 의로운 자들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야고보의 의도를 생각하면 모든 난제가 해결된다. 야고보의 의도는 다만 헛되이 믿음이 있는 체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선행을 멸시하는 자들의 악한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 17: 12).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야고보서를 평가절하 했다는 오해가 있다. 실제로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는 "야고보서는 다른 성경들과 비교했을 때 지푸라기 같다.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 했다. 그래서 그의 독일어 번역 신약성경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제외했다(1522). 그러나 그는 신구약 전체 번역본에서는 야고보서를 편입시켰다(1534). 이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행위만의 구원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의 일치및 균형'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VI. 믿음은 이런 것이다
1.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마 10:32). 신앙의 박해 시대에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는 고백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행위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 10:10)는 바울의 설명도 같은 맥락에 있다. 네로(Nero) 황제 때, 로마에 사는 크리스찬들에게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Credo in Jesum Christum)”는 고백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 폴리갑(Policap, AD 80-165)의 고백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화형을 집행하는 서머나 총독 스타티우스(Statius) 앞에서 고백했다. “내가 86년 동안 살아오도록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으신데 어찌 내가 지금 주님을 부인한단 말이오”.
요사이는 잔치 분위기 속에서 세례식을 한다. 꽃다발, 찬양, 기념사진, 기념선물, 축하와 격려속에서 신앙을 고백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의미있는 순간이 있을까? 그렇지만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참된 믿음은 앎과 느낌을 넘어서는 삶의 변화이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2. 사람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행함을 보고 구원을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8). 실제로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사 64:6).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갈 2:16).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by grace through faith)”만 구원을 얻는다.
그렇지만 믿음은 반드시 의로운 행위를 낳게 된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마 7: 17-19). 의로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나 가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6).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결코 아니다. 입술만의 믿음, 마음만의 믿음을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멸망의 길이다(마 7:13).
"지금은 이렇게 살아도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에 가면 된다"는 식의 믿음은 마귀적(diabolical)이다.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대충 살아도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최선을 다해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고 힘을 써야 한다.
이신칭의를 가르친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빌 2:12), 그리고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을 하면서(고전 9:2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빌 3: 14).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약속하신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였다(빌 3:11).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본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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