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진실(6) 예수가 거절한 사람: 염소(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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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31회 작성일 24-02-26 12:51본문
II. 염소와 같은 사람의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1. 행위의 대상이 문제다.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 25: 41-45).
1)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그들이 항변을 하자,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one of the least of these)”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로 내가 베풀어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2) 염소과에 속하는 사람들은 되값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베풀지 않았다. 주고받을(give and take)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베풀었다. 식사 한 끼를 대접해도 이익이 돌아 올 수 있는 사람에게 한다면 그것은 거래(deal)가 된다. 좋게 보아서, 우정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에는 미치지 못 한다.
2. 행위의 태도가 관건이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선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네가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위선자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길거리에서 하듯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마 6: 1-4a)
1)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선행은 “일부러 하는 선행”, 즉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된다.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때에 오히려 심판 받는다. 결코 선한 행동도 아니었다.
2) 무슨 말인가? 염소과에 속한 사람들이 간혹 ‘지극히 보잘 것없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다. 자신의 물질과 사람들의 칭찬을 거래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된다. 심판 받는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갈 6: 7).
3. 그럼에도 이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지 않는 재판장에게 항변할 뿐이다. 자신들이 옳고 재판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아니, 그 삼엄한 최후의 재판 자리,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그냥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십자가의 강도보다 못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III. 마태복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예수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 20). 여기서 예수가 의미한 “의(δικαιοσύνη, righteousness)”는 실천적 의다.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착한 행실이다(마 5:16). 그런데 착한 행위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 바리새인들도 착한 행위를 많이 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구제와 선행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세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의로운 자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세리였다(눅 18: 9-14).
2)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의는 어떤 것일까? “보여주는 의(righteousness to be seen)”다(마 6:1).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가 된다. 위선자들이다. 위선자들은 결코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런 자들을 극혐하신다.
2.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마 7: 18-20).
1) 예수는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사람이 나쁜 행동을 왜 하는가? 사람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행동은 한 순간의 행동이 아니다. 열매가 한 순간에 열리는 것이 아니듯, 열매와 같은 행동은 평생의 삶의 결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행동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의 기나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는 행동이 문제가 된다.
2) 일생 동안 기다려도 열매가 맺히지 않는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가짜이거나 죽은 나무이다.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아니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이 열매 맺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신다. 열매, 즉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만 천국에 가기 때문이다.
3)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치막 책이다. 즉 성경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혼인잔치가 열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신부가 되어 혼인예복, 즉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참석한다. 그런데 혼인예복은 바로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이다(계 19: 8). 예수의 신부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지막에 "의로운 행위"가 없으면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을까? 의로운 행위는 곧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눅 13: 8b-9).
1. 행위의 대상이 문제다.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 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 25: 41-45).
1)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그들이 항변을 하자,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one of the least of these)”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로 내가 베풀어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2) 염소과에 속하는 사람들은 되값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베풀지 않았다. 주고받을(give and take)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베풀었다. 식사 한 끼를 대접해도 이익이 돌아 올 수 있는 사람에게 한다면 그것은 거래(deal)가 된다. 좋게 보아서, 우정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에는 미치지 못 한다.
2. 행위의 태도가 관건이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선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네가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위선자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길거리에서 하듯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마 6: 1-4a)
1)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선행은 “일부러 하는 선행”, 즉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된다.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 때에 오히려 심판 받는다. 결코 선한 행동도 아니었다.
2) 무슨 말인가? 염소과에 속한 사람들이 간혹 ‘지극히 보잘 것없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다. 자신의 물질과 사람들의 칭찬을 거래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된다. 심판 받는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갈 6: 7).
3. 그럼에도 이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행동을 알아주지 않는 재판장에게 항변할 뿐이다. 자신들이 옳고 재판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아니, 그 삼엄한 최후의 재판 자리,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그냥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십자가의 강도보다 못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III. 마태복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예수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 20). 여기서 예수가 의미한 “의(δικαιοσύνη, righteousness)”는 실천적 의다.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착한 행실이다(마 5:16). 그런데 착한 행위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 바리새인들도 착한 행위를 많이 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구제와 선행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세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의로운 자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세리였다(눅 18: 9-14).
2)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의는 어떤 것일까? “보여주는 의(righteousness to be seen)”다(마 6:1).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가 된다. 위선자들이다. 위선자들은 결코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런 자들을 극혐하신다.
2.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마 7: 18-20).
1) 예수는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사람이 나쁜 행동을 왜 하는가? 사람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행동은 한 순간의 행동이 아니다. 열매가 한 순간에 열리는 것이 아니듯, 열매와 같은 행동은 평생의 삶의 결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행동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의 기나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는 행동이 문제가 된다.
2) 일생 동안 기다려도 열매가 맺히지 않는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가짜이거나 죽은 나무이다.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아니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이 열매 맺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신다. 열매, 즉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만 천국에 가기 때문이다.
3)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치막 책이다. 즉 성경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혼인잔치가 열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신부가 되어 혼인예복, 즉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참석한다. 그런데 혼인예복은 바로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이다(계 19: 8). 예수의 신부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지막에 "의로운 행위"가 없으면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을까? 의로운 행위는 곧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눅 13: 8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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