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진실(2) 십자가의 강도: 지옥에 보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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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49회 작성일 24-02-19 17:00본문
I. 먼저 다음의 질문을 해 보자.
1. 그에게 세례를 준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
군부독재시절 대통령을 지냈던 노태우씨가 오옹진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006). 그는 12·12 쿠데타와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와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던 사람이다(1996).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러다가 전두환 마저 세례 받겠다고 하면 어쩌지?”
2.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 지존파(至尊派)의 엽기적 살인 사건은 당시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다. 두목 김기환을 비롯한 일당 7명이 일 년 동안 5명을 죽였다(1993-1994). 이들은 여성을 납치, 강간, 그리고 사체를 소각했다. 또한 선량한 부부를 납치, 그들의 인육을 먹고,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소각했다.
이들의 행동강령 첫 번째는 "우리는 부자들을 증오한다" 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들이 살해한 대상은 아무 죄도 없는 약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홍길동의 후예가 아니라, 뻔뻔하고도 파렴치한 살인자들에 불과했다.
2) 이재명 집사는 이들에게 전도한 사건을 “전도행전”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2013). 그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포함한 전도특공대를 조직해서 끈질기게 그들에게 전도했다. 마침내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들의 몸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 갔다는 간증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오히려 당신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이제 믿기만 하면 된다" 라고 설득한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과 친지들은? 이 사건을 보고 있었던 국민들의 감정은? 기독교의 구원은 사회정의를 부정하는 것인가?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값싼 구원을 팔아먹는 종교일까?
II. 구원은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1. 예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어야 할까?
1) 예수가 자기 옆의 죽어가는 강도를 구원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요구를 거절했어야 옳았을까? 무엇이 “의롭고 공평한” 행동일까? “의롭고 공평한”이라는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본 기준인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십자가의 강도는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책임을 지고 정의를 구현했다. 자신의 죄값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너는 절대로 안 돼” 라고 했어야 할까?
2) 예수는 빌라도가 아니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 12: 47b).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b). 예수는 지금 빌라도의 심판이 정당하지 못하므로 그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생명의 주인으로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한 예수가 불공평한가?
3) 그렇다면 이 사람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어떠한 죄값도 치르지 않고 평안히 살다가 죽는 사람에 대하여, 왜 사회는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 하는가? 약자에게만 정의로운 사회가 정의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지존파의 두목 김기환의 질문이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죄인데 우리는 왜 유죄냐?” 이러한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최종 해답이지 해결책이 바로 구원이다.
2. 구원은 세상의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1.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려는가?
유대인들이 간음하던 여자를 예수에게 끌고 왔다. 그들은 다 손에 돌을 들고 있었다. 예수에게 물었다. 이 여자가 죄를 지었는데, 죽여야 할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 8: 7). 그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떠나갔다.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옳고 공평한 행위일까? 그렇다면 간음한 남자는 왜 끌고 오지 않았을까? 그들은 간음한 적이 없을까? 간음이 아니더라도 다른 죄를 지은 적이 없을까? 의롭지 못한 자들이 의를 주장하는가? 그 여자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예수가 불공평한가? 그들에게 또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거절할 것인가?
2. 불공평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모아서 일을 시켰다. 그들에게 하루 일당(日當)을 약속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 오전 9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있었다. 오후 6시에 주인이 와서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 데나리온, 즉 일당을 지불했다.
그러자 맨 처음에 온 사람이 불평했다. "주인이 공평하지 않다". 주인이 대답했다. 내가 왜 공평하지 않은가? 첫째,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일거리를 주지 않았더라면 너의 가족들은 오늘 굶었을 것이다. 둘째, 나는 처음부터 일당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 셋째, 나의 돈을 가지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일당을 준 것이 왜 잘못인가? 그것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주장하는 공평(justice)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보다 늦게 오고, 일도 적게 한 저 사람이 어찌 나와 똑같은 돈을 받는단 말인가?" 예수의 입장은 무엇인가? “너에게 일거리를 준 것 자체가 나의 은혜다”. “너는 어찌 너만 생각하는가? 오후 5 시에 온 사람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지 않는가”. 그는 공평을 요구했지만, 그것이 다른 한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불공평이 되었다. 자기중심적 정의와 사랑이 결여된 정의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다.
III.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1.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강조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냐?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마 20: 15, 현대인).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이 세상에서의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잘못을 했어도, 그 사람의 생명의 주인으로서,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second chance)를 주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너그러움이 비위에 거슬리는가?"
2.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사람이 천국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이 만든 천국에 사람이 은혜를 받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이고, 하나님의 정의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구원은 그런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 18-19)
1. 그에게 세례를 준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
군부독재시절 대통령을 지냈던 노태우씨가 오옹진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006). 그는 12·12 쿠데타와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와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던 사람이다(1996).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러다가 전두환 마저 세례 받겠다고 하면 어쩌지?”
2.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 지존파(至尊派)의 엽기적 살인 사건은 당시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다. 두목 김기환을 비롯한 일당 7명이 일 년 동안 5명을 죽였다(1993-1994). 이들은 여성을 납치, 강간, 그리고 사체를 소각했다. 또한 선량한 부부를 납치, 그들의 인육을 먹고,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소각했다.
이들의 행동강령 첫 번째는 "우리는 부자들을 증오한다" 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들이 살해한 대상은 아무 죄도 없는 약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홍길동의 후예가 아니라, 뻔뻔하고도 파렴치한 살인자들에 불과했다.
2) 이재명 집사는 이들에게 전도한 사건을 “전도행전”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2013). 그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포함한 전도특공대를 조직해서 끈질기게 그들에게 전도했다. 마침내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들의 몸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 갔다는 간증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오히려 당신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이제 믿기만 하면 된다" 라고 설득한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 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과 친지들은? 이 사건을 보고 있었던 국민들의 감정은? 기독교의 구원은 사회정의를 부정하는 것인가?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값싼 구원을 팔아먹는 종교일까?
II. 구원은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1. 예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어야 할까?
1) 예수가 자기 옆의 죽어가는 강도를 구원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요구를 거절했어야 옳았을까? 무엇이 “의롭고 공평한” 행동일까? “의롭고 공평한”이라는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본 기준인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십자가의 강도는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책임을 지고 정의를 구현했다. 자신의 죄값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너는 절대로 안 돼” 라고 했어야 할까?
2) 예수는 빌라도가 아니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 12: 47b).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b). 예수는 지금 빌라도의 심판이 정당하지 못하므로 그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생명의 주인으로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한 예수가 불공평한가?
3) 그렇다면 이 사람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어떠한 죄값도 치르지 않고 평안히 살다가 죽는 사람에 대하여, 왜 사회는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 하는가? 약자에게만 정의로운 사회가 정의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지존파의 두목 김기환의 질문이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죄인데 우리는 왜 유죄냐?” 이러한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최종 해답이지 해결책이 바로 구원이다.
2. 구원은 세상의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1.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려는가?
유대인들이 간음하던 여자를 예수에게 끌고 왔다. 그들은 다 손에 돌을 들고 있었다. 예수에게 물었다. 이 여자가 죄를 지었는데, 죽여야 할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 8: 7). 그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떠나갔다.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옳고 공평한 행위일까? 그렇다면 간음한 남자는 왜 끌고 오지 않았을까? 그들은 간음한 적이 없을까? 간음이 아니더라도 다른 죄를 지은 적이 없을까? 의롭지 못한 자들이 의를 주장하는가? 그 여자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예수가 불공평한가? 그들에게 또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거절할 것인가?
2. 불공평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가?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모아서 일을 시켰다. 그들에게 하루 일당(日當)을 약속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 오전 9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있었다. 오후 6시에 주인이 와서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 데나리온, 즉 일당을 지불했다.
그러자 맨 처음에 온 사람이 불평했다. "주인이 공평하지 않다". 주인이 대답했다. 내가 왜 공평하지 않은가? 첫째,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일거리를 주지 않았더라면 너의 가족들은 오늘 굶었을 것이다. 둘째, 나는 처음부터 일당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 셋째, 나의 돈을 가지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일당을 준 것이 왜 잘못인가? 그것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주장하는 공평(justice)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보다 늦게 오고, 일도 적게 한 저 사람이 어찌 나와 똑같은 돈을 받는단 말인가?" 예수의 입장은 무엇인가? “너에게 일거리를 준 것 자체가 나의 은혜다”. “너는 어찌 너만 생각하는가? 오후 5 시에 온 사람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지 않는가”. 그는 공평을 요구했지만, 그것이 다른 한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불공평이 되었다. 자기중심적 정의와 사랑이 결여된 정의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다.
III.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1.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강조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냐?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마 20: 15, 현대인).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이 세상에서의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잘못을 했어도, 그 사람의 생명의 주인으로서,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second chance)를 주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너그러움이 비위에 거슬리는가?"
2.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사람이 천국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이 만든 천국에 사람이 은혜를 받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이고, 하나님의 정의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구원은 그런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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