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20) 교회의 대형화는 바벨탑이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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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961회 작성일 24-01-25 18:05본문
앞에서 세습의 논리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 큰 교회를 남에게 줄 수 없다", "내가 세웠으니 내 뜻대로 한다". 세습의 논리는 성경에 어떠한 근거도 없다. 예수의 길이 아닌 가야바의 길이다.
I. 교회의 대형화는 비성경적이다.
1. 첫째, “예루살렘 교회도 하루에 3천 명씩 성장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 41, 개역개정).
여기서 “신도(信徒)”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 누가(Luke)는 “프시케(ψυχή)”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생명(soul)이라는 뜻이다. 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신도 수가 불어났다”는 것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는 바로 앞의 구절, “세례를 받으매…” 에서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세례받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사도행전의 흐름이 개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닌 전 세계에로의 복음 전파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2. 둘째, 그 날 '세례 받은 3천 명'이 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해외로부터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Jewish Diaspora)이거나, 혹은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God-fearers or Proselyte)이었다(행 2: 5-11). 이들의 대부분은 유월절이 끝나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3. 셋째, 예루살렘 교회 그 자체도 신앙의 박해로 흩어졌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행 2: 1-4).
1)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적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짐이 세계선교를 위한 흐름의 시작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화를 유지했었더라면 세계선교의 물꼬(waterway)는 막힐뻔 했다는 것이다.
2) 박해 전에 예루살렘 교회안에서는 이미 유대파와 헬라파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그렇게 성령충만한 교회가 구제품 때문에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렸다. 누가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무리 성령충만해도, 분위기가 천국같아도, 오랫동안 모여 있으면 고인물이 된다. 교회는 흐름이 되어야 한다. 절대로 고이지도 않고 막히지도 않는 흐름 말이다. 만약에 누가 그 흐름을 막아서 댐으로 만들어 버리면 이내 악취가 발생한다.
흔히들 말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의 모델이다. 7 집사를 선출하여 분쟁을 해결한 것은 모든 교회의 좋은 선례가 된다고들 한다.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싸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고인물이 아닌 흐름(flow)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도행전의 행간(行間)의 메시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3)이어지는 사도행전의 전개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에베소에서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세례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를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예배장소를 빌려서 사용했고, 모인 힘을 가지고는 에베소 주변에 복음을 더 널리 전하는데 주력했다. 바울 자신도 박해로 인하여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팀을 인도하신 성령의 뜻이라고 보여진다.
II. 교회의 대형화는 복음전파에 비효율적이다
1. 나는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교회의 스탭에게 물었다. “이 교회의 전도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는 전도에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기도 벅찹니다”.
다른 대형교회의 목회자에게 물었다. “이 교회는 구역(셀) 모임이 잘 되고 있지만, 다른 작은 교회에서는 모임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도 자신있게 대답했다 . “교인들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과연 그럴까? 대형교회는 그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줄 수도 있다.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당장 산 밑에서는 귀신들린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2. 여기에 중요한 사실(fact)이 있다. 크리스찬 슈바르츠(Christian A. Schwarz)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는 소형교회에 비하여 전도의 효율이 16분의 1, 은사 사용의 효율이 2분의 1에 불과하다. 그는 전세계의 약 1천 개의 교회를 조사하고 분석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아니 큰 교회가 일을 많이 하는게 아니었어? 아니었다. 물론 큰 교회가 복음전파에 장점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니라는 것이 슈바르츠의 분석이다.
3. 미국 일리노이주의 윌로우크리크 교회(Willow Creek Church)가 창립 30 주년에 발간한 보고서(REVEAL: Where Are You?, 2007) 의 서문에서,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난 30년 동안의 제자훈련을 반성해 보면, 예수의 제자만들기에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프로그램 중심의 제자훈련에서 경건훈련 중심의 제자훈련으로, 교회의 대형화에서 교회의 소형화에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들도 놀랐다. 큰 교회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가르치면 예수의 제자들이 양성될 것이라는 상식이 무너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reveal) 함께 고민해 보자는 태도는 훌륭했다. 제자훈련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예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누가 예수처럼 살아 가는가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데 일조했다.
4. "교회의 열기가 뜨겁다". "분위기가 좋다". "교회학교의 시설과 프로그램이 우수하다". "큰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실제로 예수 닮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회의 사명 감당과도 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신기루(mirage)일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 이집트 남쪽의 사막에서 신기루를 본 적이 있다. 저 멀리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호수인지" 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신기루, 즉 없어질 허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크리스찬들은 교회 대형화가 신기루임을 모르고 있을까?
I. 교회의 대형화는 비성경적이다.
1. 첫째, “예루살렘 교회도 하루에 3천 명씩 성장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 41, 개역개정).
여기서 “신도(信徒)”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 누가(Luke)는 “프시케(ψυχή)”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생명(soul)이라는 뜻이다. 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신도 수가 불어났다”는 것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는 바로 앞의 구절, “세례를 받으매…” 에서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세례받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사도행전의 흐름이 개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닌 전 세계에로의 복음 전파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2. 둘째, 그 날 '세례 받은 3천 명'이 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해외로부터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Jewish Diaspora)이거나, 혹은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God-fearers or Proselyte)이었다(행 2: 5-11). 이들의 대부분은 유월절이 끝나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3. 셋째, 예루살렘 교회 그 자체도 신앙의 박해로 흩어졌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행 2: 1-4).
1)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적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짐이 세계선교를 위한 흐름의 시작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화를 유지했었더라면 세계선교의 물꼬(waterway)는 막힐뻔 했다는 것이다.
2) 박해 전에 예루살렘 교회안에서는 이미 유대파와 헬라파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그렇게 성령충만한 교회가 구제품 때문에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렸다. 누가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무리 성령충만해도, 분위기가 천국같아도, 오랫동안 모여 있으면 고인물이 된다. 교회는 흐름이 되어야 한다. 절대로 고이지도 않고 막히지도 않는 흐름 말이다. 만약에 누가 그 흐름을 막아서 댐으로 만들어 버리면 이내 악취가 발생한다.
흔히들 말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의 모델이다. 7 집사를 선출하여 분쟁을 해결한 것은 모든 교회의 좋은 선례가 된다고들 한다.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싸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고인물이 아닌 흐름(flow)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도행전의 행간(行間)의 메시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3)이어지는 사도행전의 전개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에베소에서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세례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를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예배장소를 빌려서 사용했고, 모인 힘을 가지고는 에베소 주변에 복음을 더 널리 전하는데 주력했다. 바울 자신도 박해로 인하여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팀을 인도하신 성령의 뜻이라고 보여진다.
II. 교회의 대형화는 복음전파에 비효율적이다
1. 나는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교회의 스탭에게 물었다. “이 교회의 전도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는 전도에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기도 벅찹니다”.
다른 대형교회의 목회자에게 물었다. “이 교회는 구역(셀) 모임이 잘 되고 있지만, 다른 작은 교회에서는 모임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도 자신있게 대답했다 . “교인들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과연 그럴까? 대형교회는 그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줄 수도 있다.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당장 산 밑에서는 귀신들린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2. 여기에 중요한 사실(fact)이 있다. 크리스찬 슈바르츠(Christian A. Schwarz)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는 소형교회에 비하여 전도의 효율이 16분의 1, 은사 사용의 효율이 2분의 1에 불과하다. 그는 전세계의 약 1천 개의 교회를 조사하고 분석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아니 큰 교회가 일을 많이 하는게 아니었어? 아니었다. 물론 큰 교회가 복음전파에 장점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니라는 것이 슈바르츠의 분석이다.
3. 미국 일리노이주의 윌로우크리크 교회(Willow Creek Church)가 창립 30 주년에 발간한 보고서(REVEAL: Where Are You?, 2007) 의 서문에서,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난 30년 동안의 제자훈련을 반성해 보면, 예수의 제자만들기에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프로그램 중심의 제자훈련에서 경건훈련 중심의 제자훈련으로, 교회의 대형화에서 교회의 소형화에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들도 놀랐다. 큰 교회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가르치면 예수의 제자들이 양성될 것이라는 상식이 무너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reveal) 함께 고민해 보자는 태도는 훌륭했다. 제자훈련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예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누가 예수처럼 살아 가는가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데 일조했다.
4. "교회의 열기가 뜨겁다". "분위기가 좋다". "교회학교의 시설과 프로그램이 우수하다". "큰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실제로 예수 닮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회의 사명 감당과도 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신기루(mirage)일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 이집트 남쪽의 사막에서 신기루를 본 적이 있다. 저 멀리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호수인지" 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신기루, 즉 없어질 허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크리스찬들은 교회 대형화가 신기루임을 모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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