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19) 목회자 세습(世襲)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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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95회 작성일 24-01-23 12:16본문
I. 목회자 세습의 논리
1. 목회자 세습(世襲)이 한국교회의 논란(論難)거리가 된 적이 있다. 사회의 언론들마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수면아래로 가라앉은 분위기다. 세습이 더 이상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아무리 떠들어도 세습은 진행되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교회의 인적 구성이 가족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세습이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한국교회의 굳어짐과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향후 교회는 선교지향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더욱 자기 방어적으로 바뀔 것이다.
2. 세습의 논리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보여진다.
1)첫째, “이 큰 교회를 남에게 줄 수 없다”
어떤 교회의 세습의 현장에서 나온 무언(無言)의 슬로건이다. 원로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담임목사 두 사람이 이미 몇년 간격으로 교회를 떠났다. 그들도 다 원로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이제는 본 교회 출신 중에서 담임으로 세울만한 후보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 출신의 목사에게 담임의 자리를 내어 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누구를 담임으로 세울 것인가? 원로목사의 아들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어수선한 리더십 공백기의 언제부터인가, 장로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이제는 걔가 오는 수밖에 없다”. 안수집사들의 입에서는, “이제는 그 형이 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자 성도들의 입에서는, “이제는 그 오빠가 와야 해”.
이들은 다 원로목사의 아들과 함께 자라 난 토박이들이다. 원로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결혼 주례를 받았고, 혹은 직분을 임명 받았다. 동시에 그 교회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남이 아닌, "우리"였다. 그야말로 울타리를 재확인 하는 순간이었다. 목회자 세습은 목사 개인의 생각뿐 아니라 집단의 의지와 이익이 작용한다.
2)둘째, “내 것은 내 맘대로 해야 한다”.
아들을 후임자로 세우기에 성공한 원로목사가 언제부터인지 아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흔적을 교회안에서 지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목회방향을 비판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한 잔소리 많은 구세대를 밀어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갔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끝없는 비방전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다시 분열되었다. 예전처럼 담임목사를 내 보낼 수도 없었다. 오너십(ownership)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속에서, 이제는 교인들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늙은 아버지는 결코 교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이 교회는 내가 세웠다. 네가 나가라”. 내가 세웠기 때문에 나의 방침대로 해야 한다. 그럴려고 무리를 해서라도 너를 세웠는데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어?" 이처럼 아들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친분관계도 없는 목사를 단지 '훌륭한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후임자로 세우는 위험을 처음부터 만들 이유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세습의 논리다.
이는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꽤 오래 된 교회에서의 일이다. 다른 교회에서 온 여자 성도가 주일 아침 교회당 앞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때, 그 교회의 토박이 권사가 옆에 와서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보통의 경우는 “수고 많아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고맙다”고 했을까? 그 여자 성도는 마침내 깨달았다. “아, 이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봉사해도 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이방인이구나. 그들이 주인이고!”
그렇다.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헌금하고 봉사해서 교회에 도움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의 리더십을 요구한다면, 그 고마움이 변하여 괘씸죄가 되어 버린다. “아니, 우리가 수고하여 세운 교회에 들어온 주제에 어디 감히…”.
3. 세습의 논리는 신앙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
세습을 둘러 싼 싸움의 현장을 보면, 사람들은 두 가지의 행동지침으로 줄을 선다. 첫째, 이 교회가 누구의 것이냐? 둘째, 너는 누구의 편이냐?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이고 신앙적인 근거도 없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것을 빼앗길 수 없다는 '신앙의 탈을 쓴 집단이기심' 만 보인다.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슬로건이 믿음을 대체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교회가 어떤 것(what the church is)'인지도 생각지 않으면서. 예수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성전지킴이' 가야바의 제자들만 득실거린다.
1. 목회자 세습(世襲)이 한국교회의 논란(論難)거리가 된 적이 있다. 사회의 언론들마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수면아래로 가라앉은 분위기다. 세습이 더 이상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아무리 떠들어도 세습은 진행되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교회의 인적 구성이 가족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세습이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한국교회의 굳어짐과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향후 교회는 선교지향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더욱 자기 방어적으로 바뀔 것이다.
2. 세습의 논리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보여진다.
1)첫째, “이 큰 교회를 남에게 줄 수 없다”
어떤 교회의 세습의 현장에서 나온 무언(無言)의 슬로건이다. 원로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담임목사 두 사람이 이미 몇년 간격으로 교회를 떠났다. 그들도 다 원로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이제는 본 교회 출신 중에서 담임으로 세울만한 후보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 출신의 목사에게 담임의 자리를 내어 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누구를 담임으로 세울 것인가? 원로목사의 아들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어수선한 리더십 공백기의 언제부터인가, 장로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이제는 걔가 오는 수밖에 없다”. 안수집사들의 입에서는, “이제는 그 형이 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자 성도들의 입에서는, “이제는 그 오빠가 와야 해”.
이들은 다 원로목사의 아들과 함께 자라 난 토박이들이다. 원로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결혼 주례를 받았고, 혹은 직분을 임명 받았다. 동시에 그 교회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남이 아닌, "우리"였다. 그야말로 울타리를 재확인 하는 순간이었다. 목회자 세습은 목사 개인의 생각뿐 아니라 집단의 의지와 이익이 작용한다.
2)둘째, “내 것은 내 맘대로 해야 한다”.
아들을 후임자로 세우기에 성공한 원로목사가 언제부터인지 아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흔적을 교회안에서 지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목회방향을 비판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한 잔소리 많은 구세대를 밀어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갔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끝없는 비방전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다시 분열되었다. 예전처럼 담임목사를 내 보낼 수도 없었다. 오너십(ownership)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속에서, 이제는 교인들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늙은 아버지는 결코 교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이 교회는 내가 세웠다. 네가 나가라”. 내가 세웠기 때문에 나의 방침대로 해야 한다. 그럴려고 무리를 해서라도 너를 세웠는데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어?" 이처럼 아들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친분관계도 없는 목사를 단지 '훌륭한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후임자로 세우는 위험을 처음부터 만들 이유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세습의 논리다.
이는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꽤 오래 된 교회에서의 일이다. 다른 교회에서 온 여자 성도가 주일 아침 교회당 앞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때, 그 교회의 토박이 권사가 옆에 와서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보통의 경우는 “수고 많아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고맙다”고 했을까? 그 여자 성도는 마침내 깨달았다. “아, 이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봉사해도 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이방인이구나. 그들이 주인이고!”
그렇다.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헌금하고 봉사해서 교회에 도움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의 리더십을 요구한다면, 그 고마움이 변하여 괘씸죄가 되어 버린다. “아니, 우리가 수고하여 세운 교회에 들어온 주제에 어디 감히…”.
3. 세습의 논리는 신앙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
세습을 둘러 싼 싸움의 현장을 보면, 사람들은 두 가지의 행동지침으로 줄을 선다. 첫째, 이 교회가 누구의 것이냐? 둘째, 너는 누구의 편이냐?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이고 신앙적인 근거도 없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것을 빼앗길 수 없다는 '신앙의 탈을 쓴 집단이기심' 만 보인다.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슬로건이 믿음을 대체한다.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교회가 어떤 것(what the church is)'인지도 생각지 않으면서. 예수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성전지킴이' 가야바의 제자들만 득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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