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가야바(24) 교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다(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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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해규 댓글 0건 조회 2,889회 작성일 24-02-0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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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예수는 일한 만큼 돈을 받았을까?

  1.  받지 않았다.

1) 예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막 3: 20).
   
  예수는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하셨다. 밖에서 피곤에 지칠 정도로 일하셨지만, 집에 들어와서도 휴식을 가질 수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돌보셨다. .

2) 하지만 '일한 만큼' 받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생계비(living expenses)는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계비(생활비)는 자신의 일한 만큼에 대한 대가(reward)가 아니다. 예수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온 우주를 팔아도 부족하다.

  2.  왜 그랬을까?

 1) 종(doulos)은 일한 만큼 수고비(reward)를 받지 않는다. 받을 수 없다. 종과 주인은 계약 관계가 아니었다. 종(노예)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인에게 속해 있었다. 양자 사이에는 ‘일한 만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예수도 하나님의 종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는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하나님의 종이었다(사 42:1, 사 49:3). 예수는 구약의 예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 종으로 섬겼다(눅 22: 27, 빌 2:7).

 3)스승이 종이라면 제자들이 절대로 스승보다 높지 않다(마 10:24).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종이라는 것을 밝힌다. 바울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말로만 예수의 종이라고 하지 않고, 실제로 종으로서 살았다. 그들이 종이었는지, 아니면 종을 빙자한 사기꾼인지를 알려면 '돈에 관한 태도' 를 보면 된다. 이들은 주인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예수처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을 뿐이다. 

 4)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받을 권리도 포기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9: 14-15).

    그는 위의 말을 하기 전에 복음전파자들이 삯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의 명이라고 말하면서(고전 9: 1-13). 그렇지만 자신은 이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전파에 어떠한 지장이라도 주지 않기 위해서다(고전 9: 12). 교인들이 바울에게 생활비를 주면서 '뒷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바울은 오직 복음전파에 전념했다.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했다.

    오늘 날 어떤 이들은 바울의 삯을 받을 권리에 대한 강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당연히 삯을 받아야 하고, 교인들은 모든 좋은 것을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말보다도 마음이다. 돈 문제에 있어서도 진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일한 만큼' 많이 받고 있는 주의 종들부터 사도 바울처럼 자신들의 '권리포기 운동(waiver of rights movement)'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5)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는 자신의 최저 생활비를 정해 놓고, 수입이 많아져도 지켰다. 어느 해는 수입이 1,400 파운드였지만, 그는 여전히 30 파운드만 자신의 생활비로 사용했다. 나머지는 구제및 선교비로 지출했다. 그의 돈에 대한 태도는 예수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내가 만일 10 파운드를 내 뒤에 남겨 놓고 죽는다면....당신과 모든 인류는 나를 대적하여, 나는 도둑과 강도처럼 살고 죽었다는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1774). 실제로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지니고 있던 것은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3.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라.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눅 10: 7-9).

 1) 여기서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첫째, "일꾼(worker)"의 뜻을 생각해 보자. 예수의 제자들은 누구의 일꾼인가? 그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일꾼인가? 그럴 리는 없다. 하나님의 일꾼이다.

 2) 둘째, "삯(wages)"은 무슨 뜻인가?  일한 만큼의 대가일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일꾼)이기 때문에 일한 만큼의 수고비를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제자들의 하루 일당을 당시 노동자들의 일당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denarius)으로 계산했을까? 아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더 좋은 환경으로 옮기지 말라는 뜻이다.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고 하셨다. 더 좋은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일당도 받지 못 한 채 열심히 일했다.

 3)오늘의 일꾼들이 만약 더 좋은 환경을 쫓아서,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옮길 기회를 찾는 것은 예수의 스타일이 아니다. 더 좋은 물질적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심하는 자구책을 간구하는 것도 보기 흉하다. 예수는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너무나 자유롭고, 품위있고, 그리고 멋진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돈과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품위있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단과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고후 3: 17b-18a).


    4. 원리는 그렇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1) 만약 목회자들이 '일한 만큼'의 사례비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길로 가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들이 일한 만큼을 주장하면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어찌 하나님의 일을 시간 단위로 측정할 수 있을까? 그들이 교회에서 섬기고 있지만 그들에게 삯을 주는 것이 어찌 교회라는 단체가 될 수 있을까? 사무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이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어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2)원리는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목회자의 사례비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아무리 예수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음을 굳게 먹어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예수팀의 본을 따르면 된다. 그렇지만 오늘 날 누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까?

 3)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교회는 이미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다. 동시에 대형교회는 관료체제로 자신을 정비하고 있다. 교회가 물질(돈)을 잉여가치로 생산하는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물질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목회자들도 자신들의 '일한 만큼'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팀의 삶의 방식을 보라. 오직 복음전파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다른 일들을 최소화했다. 자신들의 '일한 만큼'의 대가 조차.
 
    나는 로마 카톨릭의 본부 건물, 즉 바티칸(Vatican City)의 건물들이 그처럼 웅장하고 화려할 필요가 있는지 항상 의아해 하고 있다. 예수는 사무실 한 칸 없었다. 교황이 왜 그처럼 화려한 행차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것이 예수의 종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는 개신교회의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왜 교회의 크기에 따른 목회자들의 지위와 소득에 격차가 생기도록 방치해 왔는가? 그것은  '일한 만큼 받는다'는 세상의 원리를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일한 만큼 많이 받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하는가?

 4) 신앙과 교회의 존재방식(way of being)을 바꾸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제도를 다 허물라는 말인가? 2 천 년에 걸쳐, 수 많은 어려움을 견뎌 온 교회를? 예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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